고디 하우

덤프버전 :


고디 하우의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하키 명예의 전당 로고.svg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1972)







파일:NHL 로고.svg NHL 관련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NHL 로고.svgStanley Cup(1950, 1952, 1954, 1955)



파일:NHL 로고.svgNHL All-Star Game 23회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7, 1968, 1969, 1970, 1971, 1980)



파일:NHL 로고.svgNHL First All-Star Team
(1951, 1952, 1953, 1954, 1957, 1958, 1960, 1963, 1966, 1968, 1969, 1970)



파일:NHL 로고.svgNHL Second All-Star Team
(1949, 1950, 1956, 1959, 1961, 1962, 1964, 1965, 1967)







파일:NHL 로고.svg시즌 최다 골[1](1951, 1952, 1953, 1954, 1957, 1963)




WHA 관련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Avco World Trophy(1974, 1975)



Gary L. Davidson Award(1974)



WHA First All-Star Team(1974, 1975)




파일:캐나다 국기.svg 서훈 이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Order of Canada.png Order of Canada(1971)



Queen Elizabeth II Silver Jubilee Medal(1977)



Queen Elizabeth II Golden Jubilee Medal(2002)



Queen Elizabeth II Silver Diamond Medal(2012)




파일:NHL 로고.svg 보유 중인 NHL 기록

[ 펼치기 · 접기 ]
NHL 최다 경기 출장(1767경기)[1]
NHL 단일팀 정규시즌 최다 경기 출장(디트로이트 레드윙스, 1687경기)
NHL 및 WHA 최다 정규시즌 경기 출장(2186경기)
NHL 및 WHA 최다 경기 출장(2421경기)
NHL 및 WHA 최다 정규시즌 골(975골)
NHL 최다 시즌 출장(26시즌)[2]
NHL 및 WHA 최다 시즌 출장(32시즌)
NHL 라이트윙어 정규시즌 최다 골(801골)
NHL 부자(父子) 합작 최다 정규시즌 포인트 기록(with 마크 하우, 2592포인트)
NHL 최다 연속 20골 시즌(1949-1971, 22시즌 연속)
최초 프로 개인 통산 1000골 달성
NHL 최초 1500경기 출장
NHL 최다 플레이오프 득점왕(6회)
NHL 최고령 출장 기록(만52세 11일)
NHL 올스타전 최다 출전(23회)



파일:디트로이트 레드윙스 로고.svg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기록

[ 펼치기 · 접기 ]
최다 경기 출장(1687경기)
최다 골(786골)
최다 포인트(1809포인트)
최다 이븐 스트렝스 골(553골)
최다 파워플레이 골(209골)
최다 결승골(121골)
최다 해트트릭(19회)




파일:고디 하우.jpg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No.9
고디 하우
Gordie Howe OC[1]

출생
1928년 3월 31일
[[캐나다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자치령"
행정구
]]
서스캐처원주 플로랄[2]
사망
2016년 6월 10일 (향년 88세)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신체
183cm, 93kg
포지션
라이트윙

오른쪽[3]
입단
1944년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입단
소속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1946~1971)
뉴잉글랜드-하트퍼드 웨일러스[4] (1977~1980)
별명
Mr. Hockey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출생부터 하키선수가 되기까지
2.2.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와 함께한 25년
2.3. WHA 시절
2.4. NHL 복귀와 2차 은퇴
3. 가족 관계
4. 사망
5. 기타



1. 개요[편집]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선수. 오리지날 식스[5] 시절의 내셔널 하키 리그 초중반의 슈퍼스타이자, 18살때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해 52세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 40,50,60,70,80년대 무려 5 decade에 거쳐 선수생활을 해온 氷神빙판의 신령님이자 하키 그 자체를 상징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북미 스포츠에서 하우를 상징하는 단어는 Mr. Hockey. 하우를 동경하던 어느 전설적인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웬만한 기록은 전부 하우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출생부터 하키선수가 되기까지[편집]


서스캐처원주 촌구석 플로랄(Floral)의 농가에서 9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지만, 생후 9일째 되는 날 주의 최대도시인 새스커툰으로 이사했다. 하키는 8살 때 처음 시작했고, 어린 시절 대공황을 보내면서 아버지를 도와 학교를 관두고 건설 일을 하다보니 10대에 다다랐을 때 이미 키가 180cm를 넘겼다고 한다.

16살 때, 본격적으로 새스커툰의 하키 클럽에서 선수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942년에는 우승도 거뒀다. 1943년에는 당시 NHL의 여섯 팀 중 하나였던 뉴욕 레인저스위니펙에 있는 트레이닝 캠프에 초청하고, 서스캐처원주의 가톨릭 학교에서 활약 및 NHL 데뷔할 권리를 주겠다고 계약을 원했지만, 하우는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하기 위해서 계약을 거절했다.

1944년, 마찬가지로 NHL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스카우터의 눈에 띄면서 디트로이트와 마주보고 있는 윈저(캐나다)의 트레이닝 캠프에 초청되었고, 계약까지 맺었다.

1945년 레드윙스 산하의 USHL 팀 오마하 나이츠에서 51경기 48포인트를 기록했고, 이 때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의 프랭크 셀키(Frank Selke)[6]가 하우가 레드윙스의 보호 선수 명단에 제대로 등록되지 않은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레드윙스의 감독 잭 애덤스와 친분이 있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2.2.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와 함께한 25년[편집]


1946-47 시즌 개막전에 라이트윙어로 데뷔를 했고 금방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잡았지만, 데뷔 시즌에 하도 자주 싸워서 오죽하면 애덤스 감독이 "니가 싸울 수 있는 건 알겠는데 이젠 하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을 정도. 하키계에서 단일 경기 골과 어시스트, 싸움(...)을 모두 기록하면 '고디 하우 해트트릭'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정작 그는 커리어 내내 딱 2회만 기록했다.

파일:레드윙스 프로덕션 라인.jpg
프로덕션 라인 (좌측부터 라이트윙어 고디 하우, 센터 시드 아벨, 레프트윙어 테드 린지)

1048-49 시즌부터 1954-55 시즌까지 7시즌 연속 정규시즌 리그 1위를 달성했고, 이 시기에 또다른 레전드 시드 아벨테드 린지와 일명 '프로덕션 라인(Production Line)'을 형성하면서 리그 포인트 1~3위를 싹쓸이하고 다녔다. 특히나, 지금보다 파울에 널널했던 시절이라 그에게 거친 견제와 바디체킹이 많이 가해졌음에도[7], 당시로서는 큰 체격과 어릴 때부터 건설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체격덕분에 활약할 수 있었다.

1950년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에서 두개골 골절과 코와 광대뼈까지 부러지는 최악의 부상을 입어 그대로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하우말고도 인외마인 급 괴수들이 뛰던 레드윙스가 손쉽게 우승했다. 하지만, 이는 부상을 딛고 일어선 하우 시대의 서막을 여는 데 불과했고, 4년동안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이었다. 50-51시즌과 52-53시즌 최다 골 및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했고, 52-53시즌에는 리그 최초로 90포인트를 돌파하여 49골 46어시스트 95포인트를 기록했지만, 종전에 50골을 기록한 모리스 "로켓" 리샤르의 기록은 1골 차로 타이에 실패했다.

1950년대에는 모리스 리샤르와 라이벌리를 형성하면서[8] 서로 바디체킹도 우승도 주고받았다. 1950년대에만 네 차례에 맞붙었으며, 레드윙스가 1952년, 1954년, 1955년에 햅스를 꺾고 우승했으며, 햅스는 1956년과 1966년에 레드윙스를 꺾고 우승을 거뒀다.

1961년에는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레전드 바비 헐과도 라이벌리를 형성하기도 했고, 스탠 미키타에게 바디체킹을 당하자 뇌진탕으로 돌려주는(...) 뜨거운 승부를 펼쳤다.

1950년대의 황금기와 60년대 초반까지 패자에 오른 레드윙스는 60년대 후반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하우가 40먹은 67-68시즌부터는 알렉스 델베키오프랭크 마호블리치와 새로운 라인을 형성했다. 40의 나이에도 44골 59어시스트 103포인트로 커리어 최초로 100포인트를 돌파하는 맹활약을 선보였다.

103포인트의 시즌을 보내고 난 다음 해의 연봉이 $45,000으로 리그에서 고작(?) 3위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하우는 연봉 인상을 요구했고, 구단주가 마지못해 두 배가 넘는 $100,000으로 인상해주었지만 하우의 배우자를 비난하는 등 썩 매끄럽지는 못했다. 어찌저찌 두 시즌을 더 뛰었지만, 만성적인 손목 부상에 시달리던 하우는 70-71시즌이 종료된 이후 은퇴를 선언하고 레드윙스 프런트로 그대로 보임되었다. 1972년 초에는 뉴욕 아일런더스의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

그의 등번호 9번은 1972년 3월 12일에 영구결번되었다.

2.3. WHA 시절[편집]


레드윙스가 프런트에 영전시키고 영구결번도 지정해줬지만 프런트에서 들러리 서있는 것에 대한 불만감과 현역 연장 의지로 손목 수술도 받았던 차에 NHL에 대항하여 WHA가 창설되면서, 휴스턴 에어로스로 이적하였다.[9] 1974년과 1975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고, 46세의 나이로 MVP에 선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위니펙 제츠로 이적한 바비 헐과 라이벌리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1977년 뉴잉글랜드 웨일러스에 아들들과 함께 이적했고, 바비 헐 역시 팀원으로 합류했다. 아들이 로비 프토렉이라는 선수에게 광대뼈가 부러지자, 캐나다 대표팀 때부터 친구라며 만류하던 아들의 말을 무시하고 하키 스틱으로 냅다 얼굴에 크로스체킹을 박아버렸다(...)

만46세가 되던 1974년, 소련과의 8차전 이벤트 시리즈에 캐나다 대표팀으로 출전하였다. 아들과 같은 라인에 서면서 7경기에서 7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소련이 4승 3무로 승리했다.[10]

1979년에도 WHA 올스타를 꾸려 소련의 디나모 모스크바와 시리즈 세 경기를 치룰 때도 출전했는데, 무려 아들 마크 하우와 웨인 그레츠키와 함께 같은 라인에 섰고, 이 라인은 1전에 합계 7포인트를 기록하여 4:2 승리, 2차전에도 고디 하우가 아들 마크와 그레츠키의 골을 어시스트해주면서 역시 4:2로 승리하면서 시리즈 승리를 확정지었고, 3차전까지 가져가면서 스윕에 성공했다.

2.4. NHL 복귀와 2차 은퇴[편집]


위의 디나모와의 경기를 끝으로 WHA가 결국 해체를 맞이하면서, 뉴잉글랜드 웨일러스는 '하트퍼드 웨일러스'로 팀명을 변경하고 NHL에 가입하였다. 문제는 NHL 한정이라면 하우가 은퇴했음에도 디트로이트 레드윙스가 여전히 하우의 보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 하지만, 레드윙스가 하우의 선수 보유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웨일러스와 합의하면서 웨일러스 소속으로 만 51세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친정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홈구장 조 루이스 아레나에서 치러진 올스타전에, 그의 하키 경력에 대한 예우를 다하기 위해서 스코티 보먼 웨일스 컨퍼런스[11] 감독이 만 51세의 나이로 그를 선발 출장시켰다. 필 에스포지토와 장 라텔이라는 또다른 레전드와 함께 라인을 형성한 그는 만 19세웨인 그레츠키와도 함께 했고, 1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6:3 승리를 도왔다.

시즌 후반에는 팀이 시카고의 레전드 바비 헐을 영입하면서 함께 뛰면서 시즌 최종 80경기 전경기 출장하면서 15골 26어시스트 41포인트를 기록하면서 1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첫 라운드에서 햅스에게 패배하면서 일찍 마감했지만, 이 때 그의 나이가 만 52세 11일NHL 최고령 출장 기록을 세우고, 다시 은퇴하였다.

3. 가족 관계[편집]


  • 아내 콜린 하우와는 그녀가 만 17세가 되던 1949년에 볼링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4년 뒤인 1953년에 결혼하여, 그녀가 사망하는 2009년까지 백년해로하였다. 콜린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유소년팀 레드윙스 주니어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 형 빅 하우(Vic Howe) 역시 하키 선수였지만, 뉴욕 레인저스에서 33경기 출장에 그쳤다.

  • 3남 1녀 자식 중에서 마티 하우와 마크 하우는 아버지와 함께 선수생활을 뛰었고, 특히 마크는 웨일러스, 플라이어스, 레드윙스 등에서 16시즌을 보내면서 나름 오랜 경력을 쌓고 은퇴했다. 나머지 아들 하나 머레이 하우는 오하이오주 톨리도에서 방사선과 의사였다고.

4. 사망[편집]


2009년에 아내를 잃은 이후에는 자식 4명이 번갈아가면서 고디 하우를 돌봤다. 2014년 10월 26일, 텍사스주에 거주하는 딸의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하이오주 톨리도 인근에 거주하는 아들 머레이 하우의 집에서 2016년 6월 10일, 8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6월 14일에 조 루이스 아레나로 관이 옮겨졌고, 이 때 웨인 그레츠키, 스코티 보먼, 알 칼라인[12] 등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다음 날 15일에 그의 장례식은 디트로이트의 성당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5. 기타[편집]


  • 1971년 캐나다에서 훈장(Order of Canada)를 수여받았다.

  • 1975년 캐나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8년에 발표한 역대 최고의 NHL 선수 100인에도 웨인 그레츠키바비 오어에 이어 3위에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캐나다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는 등 그가 캐나다에서 가지는 위상을 보여준다.


  • 디트로이트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 디트로이트와 캐나다 윈저를 잇는 대교에 '고디 하우 국제 대교(Gordie Howe International Bridge)'로 명명되었고, 2024년에 완공 예정이다.

  • 2009년에 아내와 사별하면서, 치매와 알츠하이머와 같은 퇴행성 질환에 대한 자선 활동을 위한 기금을 설립했다.
[1] 캐나다 훈장 2등급, 1971년에 서훈[2] 출생 9일 후, 주의 최대 도시인 새스커툰으로 이사했다.[3] 사실, 현대에도 몇 안되는 양손잡이 선수였다.[4] 1979년까지 뉴잉글랜드 시절에는 WHA팀이었으나, 1979-80시즌부터 NHL로 편입되었다.[5]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 보스턴 브루인스, 뉴욕 레인저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시카고 블랙호크스[6] 립스와 햅스에서 무려 9차례 스탠리 컵을 들어올렸던 레전드로, 그를 기리기 위해 프랭크 J. 셀키 메모리얼 트로피를 제정하여, 정규시즌 가장 뛰어난 수비를 보여준 공격수에게 수여하고 있다.[7] 현대보다 조던 시절이 파울에 관대하여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배드보이즈를 비롯하여, 온갖 파울과 견제를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8] 마침, 두 선수 모두 등번호가 9번이었다.[9] 그의 아들 둘 역시 같이 계약을 맺었다.[10] 소련은 북미 상대로 항상 우위였는데, NHL 올스타전 목록에도 나와있듯이 NHL은 소련한테 단 한번도 시리즈 승리를 가져가본 적이 없다...[11] 現 서부 컨퍼런스.[12]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영구결번 선수.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23 18:14:23에 나무위키 고디 하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