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사천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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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8호
경주 사천왕사지
慶州 四天王寺址
Sacheonwangsa Temple Site,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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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15,72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문무왕19년(679)
위치



파일:attachment/satemple02.jpg
[1]

1. 개요
2. 역사
3. 가람배치
4. 조각
5. 기타 발굴 정보
6. 외부 링크
7. 사적 제8호


1. 개요[편집]


경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남쪽에 있다. 지금은 남북 105 m 동서 73 m인 터만 남아 '사천왕사지'라고 불린다. 사적 제8호이다.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신라의 칠처가람지허 중 하나.[2] 강당지 일대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훼손되었는데, 2021년 12월 28일에 해당 구간이 이설되면서 선로 철거 이후 복원할 수 있다.


2. 역사[편집]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천왕사가 창건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구려 멸망 후 당과 신라가 대립하다 문무왕 9년(669) 신라가 당에 사죄사(謝罪使)로 김흠순 등을 보냈으나 당고종이 크게 꾸짖고 억류한 채 전쟁을 준비하였는데, 마침 당나라에 있던 승려 의상(義湘)이 그 소식을 듣고 문무왕 10년(670)에 귀국했다. 문무왕이 사실을 전해 듣고 승려 명랑(明朗)에게 물으니 신유림(神遊林)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라 간했다. 미처 다 세우기도 전에 당나라군이 쳐들어오니, 명랑이 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풀을 엮어 신상(神像)을 세워 문두루(文豆婁)라는 밀교의 비법(秘法)을 행하자 서해에 풍랑이 일어 바다를 건너오던 당나라 군선이 침몰하여 침략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후 문무왕 19년(679)에 절을 완공하였다. 이 절이 황룡사의 목탑을 지었던 선덕여왕릉 근처[3]에 있는 것도 호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군선을 잃은 당고종이 신라사람 박문준에게 신라가 황제의 은덕을 기려 불사를 행했다는 말을 듣고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보내어 사실을 확인케 하였다. 신라는 사천왕사를 보이기 싫어 거짓으로 다른 절을 세워 악붕귀를 그리로 안내하였으나 악붕귀가 이를 간파하고 "여기는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 하였다. 결국 신라 조정은 악붕귀를 금 1천 냥으로 매수하였다. 여기서 거짓으로 세워 안내한 사찰이 망덕사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망덕사 참고. 망덕사도 사천왕사처럼 동서 쌍으로 13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사천왕사의 연막용으로 지었으므로 형태도 유사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10세기 초 경명왕 대에 신라가 혼란하자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나와 짖거나 탑의 그림자가 거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설화가 등장한다. 고려 문종 28년(1074) 7월에도 사천왕사에서 27일 동안 문두루도량을 열었다.

삼국유사에는 사천왕사 터도 과거칠불 시절의 절터 일곱 곳 중 하나로 등장한다. 아마도 사천왕사를 건립했다는 '신유림' 또한 초기 신라에서 신령하게 여기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 노는 (神遊林)이라는 이름만 봐도 원래부터 상당히 의미가 있는 땅을 선택한 티가 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이 이 절에서 묵으며 주지와 시국을 논한 뒤 근처에 원을 세웠다는 구절이 있다. 이후 폐허가 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근처의 분황사처럼 임진왜란 때문에 소실되었을 수 있다. 어쨌든 숭유억불하는 조선시대에 이런 평지의 큰 폐사지가 재건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강점기1920년대 초에 한 일본인 수집가가 거의 도굴하다시피 서탑 터를 발굴해서는 사천왕 부조상 등의 유물들을 박물관에 팔아버렸다. 이를 통해 이 절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실측 외의 발굴조사에 무심했다. 100년 전 사천왕사지 모습 황룡사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적은 다 조사했던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조차도 저서 <조선건축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독부가 절터 땅을 사들여 보존 중이지만 발굴조사를 위한 운동을 했는데도 물거품이 된 것은 애석하다.


게다가 1930년대동해남부선 철도를 절터의 강당터 위로 내버렸다. 매일마다 열차가 달리는 철도가 생겼으니 그 때부터 강당 터는 아직도 손을 전혀 대지 못했다... OTL. 현재 이 구간은 경주시를 크게 우회하는 방향으로 선로를 이설하는 공사를 하는 중이다. 2018년 12월 개통 예정이었지만 공사가 지연되어 동해선 태화강~신경주 구간 개통이 2021년 12월 28일로 늦어지자 발굴도 덩달아 늦어졌다. 철길이 지나는 부분이 사천왕사의 핵심 건물지 부분이고 철길이 놓인 이후로는 누구도 손대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획기적인 발굴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3. 가람배치[편집]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 즉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를 따른 한국 최초의 절이란 점에 의의가 있다. 금당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는 목탑 2개, 북쪽으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시설 2개를 지어, 사방에서 부처가 있는 금당을 호위하는 듯한 특이한 구조다. 북쪽에 있는 시설 2개의 용도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서 경루(불경을 보관하는 누각)로 보기도 하고, 문두루 비법을 행하는 제단[4]으로 보기도 한다.

2009년, 동해남부선 철로를 놓던 시기에 유실된 강당지 일부가 확인됐다.


4. 조각[편집]


파일:attachment/satemple01.jpg
신라시대의 뛰어난 조형을 느낄 수 있는 사천왕 부조상들이 출토되었다.[5] 상당히 사실적이고 이전의 불상 양식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예술품이다. 승려 양지가 만든 조각품이라고 추정한다. 이 외에도 보상화문 전돌 등등 조각이 뛰어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경주 박물관 소장.

파일:external/www.ibulgyo.com/100581_36387.jpg

녹유소조상(綠釉塑造像}[6] 역시 유명하다.

귀부(거북 모양 비석받침) 2개가 머리도 비석도 없어진 채 사천왕사 터에 남아있다.


5. 기타 발굴 정보[편집]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발굴작업을 하였다. 발굴현장과 유물 사진들

2011년, 사천왕사 사적비의 조각, 즉 사적비편이 발굴되었다. 신장, 대왕, 십육일, 거수, 특, 도, 이, ?, 월, ?, 영이라고 적혔다. #

2012년 6월, 발굴현장에서 보상화문전 3점과 연화문전 6점이 도난당했다가 4개월 후 발견되었다. #

문무왕릉비가 이곳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문무왕은 동해 바다에 불교식으로 장사지냈으니 왕릉이 따로 없는데, 사천왕사에 위치한 귀부 2개가 문무왕릉비 크기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문무왕릉비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재위 2년(682) 7월 25일에 건립했는데,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건립했음을 생각해보면 신빙성이 꽤 높은 가설이다. 아버지가 세운 절에 아들이 아버지를 기념하는 석비를 세웠다고 하면 충분히 말이 되기 때문이다.


6. 외부 링크[편집]




7. 사적 제8호[편집]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왕사지 → 경주 사천왕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절 터 위쪽에 일제강점기 당시 건설된 동해남부선 철도가 보이는데, 경주역이 신경주역으로 이설되며 이 철길 역시 철거될 예정이다.[2] 삼국유사에서 '전불시(前佛時) 가람지허'라고 하였다. 석가모니과거 부처 시절에 창건된 절이 있던 터란 뜻이다. 물론 석가모니, 또는 석가모니 이전 시대 부처가 살던 시절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왔을 리 없다. 학자들은 초기 신라 토착종교의 성지가 훗날 불교적으로 윤색되었다고 판단한다.[3] 삼국유사에 실려서 유명한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언' 이야기 중 마지막이 '자신의 능침을 도리천에 만들라.'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선덕여왕에게 "도대체 도리천이 어디입니까?" 하고 묻자, 여왕이 "낭산 아래가 도리천이다." 하고 알려주어 능을 그곳에 마련했다. 그런데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아래에 조성한 덕에 불경에서 설명한 대로 '도리천은 사천왕천 위에 있다.'는 조건에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 그냥 문무왕이 끼워 맞춘 것 같은데... 실제로 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지에서 북쪽으로 약 4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4] 문두루 비법은 기둥 하나에 천 여러 개를 엮어가면서 행했다고 추정하는데, 남아있는 초석 같은 석재들이 그러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5] 사천왕사가 완공된 때는 통일신라의 전성기였던 중대(650~765)였는데, 이 시기 신라의 불교미술은 최정점에 달했다.[6] 진흙으로 만들어(소조) 녹색 유약(녹유)을 발라 구운 상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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