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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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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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조상
3. 후손 / 신라말
4. 후손 / 고려초
5. 족보 위조 현상
6. 《김은열 묘지명》
7. 《신라경순왕전비》
8. 《김씨 분관록》
10. 《조선씨족통보》
11.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


1. 개요[편집]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거의 모든 신라계 김씨의 중시조이기 때문에 후손, 특히 아들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 현전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다른 기록과 충돌하는 등 사실로 보기 어려운 정보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의 진위를 검증하고 만약 거짓이라면 왜 그런 기록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경순왕의 가계에 대하여 별도로 자세히 설명한다.


2. 조상[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먼 후손[裔孫]이다. 그러나 문성왕의 몇 대손인지는 기록되지 않았고, 심지어 직계 후손이라는 보장도 없다. 비록 학계에서 거의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경순왕은 실제로는 태종 무열왕의 9세손일 가능성이 크다. 《최정 묘지명》에서 경순왕의 사촌동생인 김유렴의 현손자 김한충을 태종 무열왕의 13세손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군은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신라국을 중흥한 군주인 태종 춘추대왕의 13세손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야 추밀원사 판공부사로 은퇴하고 시호가 원평공인 한충의 둘째 딸이다. 아들로 율이 있다.

君娶金氏, 新羅國中興之主太宗春秋大王十三世孫, 守司空尙書左僕射樞密院使判工部事致仕贈謚元平公漢忠之第二女. 子有矞.

전대여 찬, 『최정 묘지명』


김한충은 신라의 대보 김알지의 후손이며, 고조 유렴은 경순왕을 따라 태조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

金漢忠, 新羅大輔閼智之後, 高祖庾廉, 從敬順王, 歸太祖爲功臣.

『고려사』 권95 열전 권제8, 김한충 조


(경순)왕이 (태조를) 혈성까지 배웅하고 사촌 동생 유렴을 인질로 삼아 어가를 따라가게 하였다.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隨駕焉.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5년 2월 조


한편 경순왕은 신라 측 고려 개국공신 4명 중에서 열조 원성왕(제38대)의 후예이면서 태종 무열왕(제29대)의 9세손인 김인윤과도 멀지 않은 친척으로 추정된다.[1] 참고로 김인윤의 가계는 그의 후손 <김지우 묘지명>에 따르면 열조 원성왕 김예 김인윤이지만, 김예가 원성왕의 아들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 조상: 문성왕
  • 증조부: 김민공(金敏恭)[2]
  • 조부: 의흥왕 김인경(金仁慶); 족보명 김실홍(金實虹)
  • 부왕: 신흥왕 김효종(金孝宗)
  • 모후: 계아태후 - 헌강왕(憲康王, 제49대)의 딸


3. 후손 / 신라말[편집]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기 이전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장남인 마의태자가 확인되며, 《삼국유사》에서는 계자(季子)의 법명을 범공(梵空)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경순왕은 죽방부인(竹房夫人)과의 사이에 두 왕자를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태자, 왕자라는 기록만 보인다. 1561년 《하서 김인후 가장》에는 처음으로 경순왕의 왕자 김덕지(金德摯)의 이름이 등장하고, 1682년 송시열의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에서는 김덕지를 경순왕의 별자(別子)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첫째 왕자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전비: 죽방부인(竹房夫人)
    • 태자: 마의태자(麻衣太子)[3]
    • 계자: 범공(梵空)[僧名:승명][A]
    • 장녀: 덕주공주[4], 황경(黃瓊)[5]에게 출가
  • 별빈[7]: 순흥 안씨(順興 安氏)[8]
    • 별자: 김덕지(金德摯)[6]

4. 후손 / 고려초[편집]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 및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9] 고려 왕실 족보인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는 낙랑공주가 5남 2녀를 두었으며 장녀는 헌숙왕후(獻肅王后)로서 경종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삼한공신이자 익재 이제현의 먼 선조인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하였다고 적혀 있다.

  • 후비: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 王氏)[12]
    • 장녀: 헌숙왕후 김씨[10] - 경종에게 출가
    • 차녀: 신란궁부인 김씨 - 이금서(李金書)[11]에게 출가
  • 후비: 부인 왕씨(夫人 王氏)

5. 족보 위조 현상[편집]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까지도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신분제 변화와 더불어 족보 위조 현상으로까지 나타났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더 이상의 특권은 없었지만 가문 그 자체를 일종의 명예로 여기는 문화는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체제가 사라져 전보다 쉽게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이후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는 각종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조선 초기에 성씨는 상민에게까지 보편화되었으나[13] 천민 계급은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라도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아무리 조선의 행정력이 현재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아얘 없던 분파를 새로 만들어 넣어 버리는 식의 족보 위조는 불가능 했을 것으로 보이며, 보통 족보 편입은 주로 방계 가계도에 슬며시 이어넣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경순왕의 직계 조상은 신라의 김씨 왕 38인 중 내물 마립간, 지증왕, 원성왕, 신무왕, 문성왕 5인이 전부이다. 따라서 그 외 왕들의 후손들과 방계까지 하면 신라계 김씨들의 조상도 지금보다 다양해야 맞다. 그러므로 주류 족보는 주로 경주 김씨들 중,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이들이 경순왕의 후손을 자처하여 특혜를 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작된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본다. 일례로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3남 영분공(永芬公)의 후손을 자처하는데, 이들의 족보에는 오류가 있음이 확인된다. 1785년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는 경순왕 - 영분공 - 임흥공(林興公) - 파간 억종(嶷宗) - 파간(波干) 계옹(季邕) - 아개공(阿盖公) - 예겸(禮謙)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특히 경순왕의 7세손인 김예겸은 삼한벽상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삼한벽상공신이란 경순왕의 고려 항복 이후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므로# 김예겸은 물리적으로 절대 경순왕의 7세손일 수 없다. 게다가 김예겸의 조부와 증조부가 파간, 즉 파진찬이라는 신라 관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분공부터 김예겸까지의 계보를 신뢰한다면 영분공은 8세기 후반의 사람이 되어 절대 경순왕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전혀 다른 성씨의 파 전체가 갑자기 편입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경주 김씨 영분공파는 신라 왕의 후손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순왕의 후손은 아닌 셈이다.

고려시대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그의 형 김부일은 《고려사》 <열전>에 경주 사람으로서 신라 왕실과 같은 성이라고 나와 있을 뿐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 나와 있지 않다. 경주 김씨뿐 아니라 강릉 김씨같이 다른 신라 왕의 후손 가문일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문선》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고 나온다.


6. 《김은열 묘지명》[편집]


조선 후기 들어 1784년 『김은열 묘지석』이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김은열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김은열 묘지명》을 근기(謹記)하였다. 주요 내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여덟 명의 아들을 더 두었는데 이름은 순서대로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었다. 특히 2자 굉과 4자 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이자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10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30리 주변을 하사해 주었다고 했다.

이듬해 1785년 후손이라 자처하는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14]이 족보를 수보하면서 위를 바탕으로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했는데,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시호를 지어내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일부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이러한 아들들의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당대의 다른 고려 묘지명과 달리 찬한 사람도 나와 있지 않고, 배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으며,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 또 8형제의 모친 관계도 2자 굉(또는 황)과 4자 은열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어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덞 명의 아들들 이름 또한 장남이라는 일(鎰)을 제외하면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말여초인 924년(경명왕 8) 찬술된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15]소판(蘇判) 김일(金鎰)이 등장하긴 하지만[16] 동명이인으로 추정된다.

7. 《신라경순왕전비》[편집]


1784년에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 후손 강릉 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前妃)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딸은 경종에게 출가했다고 기록했다. 또 후비(後妃) 왕씨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고, 두 딸은 이금서(李金書)[B], 황경(黃瓊)[C]에게 출가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3자를 영분공(永芬公)이라 추가하였다. 또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鍾)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름을 배척하거나, 추가하고 개명까지 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들은 《김은열 묘지명》을 재차 왜곡하여 자신들의 족보류에 경순왕의 첫째 왕자 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 이름을 굉(鍠)[또는 황(湟)]이라 한다. 또 3자를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이라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해당 《김은열 묘지명》에선 2자 굉(鍠)[또는 황(湟)]과 4자 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10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30리 주변을 하사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8. 《김씨 분관록》[편집]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을 건립하면서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을 편찬하면서 김덕지(金德摯)를 경순왕의 왕자라고 하였고, 그의 증조부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의 여덞 명의 아들들은 모두 배척하였다.

9. 《증보문헌비고[편집]


1908년 칙명(勅命)으로 간행된 문헌이다. 제계고(帝系考) 편에서는 씨족별로 인물과 계통, 행적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경순왕전비》를 원용하되 제6자 건(鍵), 제8자 추(錘)는 배척하였다.
  • 경주 김씨: 신라 경순왕의 제2자[17]는 공부시랑 은열(殷悅)[18]로서 일파(一波)를 이루었다. 제3자는 영분(永芬)으로 역시 일파를 이루었다. 제5자 석(錫)은 의성으로 분적하였다. 제6자 선(鐥)은 언양으로 분적하였다. 별자(別子) 덕지(德摯)는 울산으로 분적하였다. 손자[19] 운발(雲發)은 나주로 분적하였다.
  • 의성 김씨: 시조 석(錫)은 신라 경순왕의 제5자이고, 고려 외손으로서 의성군에 봉해졌다.
  • 언양 김씨: 시조 선(鐥)은 신라 경순왕의 제6자이고, 언양군에 봉해졌다.
  • 울산 김씨: 시조 덕지(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이다.
  • 나주 김씨: 시조는 운발(雲發)이다. 신라 경순왕의 계자[20]는 역사에 그 이름이 실전되었고 신라가 멸망하자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으로 해인사(海印寺)에서 살다 죽었다.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21]


10. 《조선씨족통보》[편집]


1924년 윤창현이 민족의식 고취 및 함양 일환으로 발행한 문헌이다. 조선씨족통보에서 이르길, 왕비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고, 계비 왕씨 낙랑공주는 5남 2녀를 낳았다고 한다. 또한 태자가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갔으며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을 하니 이후 마의왕자(麻衣太子)로 칭했다고 한다. 계자(季子; 막내아들)는 처자를 버리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으니 승명은 범공(梵空)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내용을 반영하여 경순왕의 제3자를 영분(永芬)으로, 제4자(혹은 제2자)를 은열(殷說)로,# 제5자를 석(錫)[22]으로,# 제6자(혹은 제7자)를 선(鐥)[23]으로 적고 있다.# 또한 울산 김씨 시조 덕지(德摯)를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적고 있다.# 나주 김씨 시조는 운발(雲發)에 대해서는, 역사에 이름이 실전된 신라 경순왕의 계자가 신라가 멸망하자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으로 해인사(海印寺)에서 살다 죽었는데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신라경순왕전비》의 제6자 건(鍵), 제8자 추(錘)는 배척하였다.

11. 조선 후기 문헌에 등장하는 자녀들[편집]


이하에 기재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가 분명치 않다. 신라가 멸망하고 무려 800년이 지나서 발견된 김은열 묘지명[24]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다른 사서와의 교차검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후비 낙랑공주 왕씨의 두 딸이 경종과 이금서에게 출가한 내용이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과 이제현 묘지명[25], 경주이씨 대동보 등에서 교차검증된다. 특히 이제현 묘지명(1375)[26]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1476)보다도 100년 가까이 앞섰고 사료적 가치도 높은 금석문이므로 그 내용의 신뢰성이 높다. 한편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두 딸이 각각 경종과 이금서에게 출가했으므로《신라경순왕전비》와 달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장녀는 황경에게 출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1784년 《김은열 묘지명》 - 김노규 근기
    • 아들[27]: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
  • 1785년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 김사목 근기
    • 아들[28]: 일(鎰), 황(湟), 명종(鳴鐘),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
  • 1814년《신라경순왕전비》 - 김계락 근기
    • 전비 박씨(3남 1녀)
      • 왕자: 태자, 차자, 영분공[29]
      • 공주: 헌숙왕후 김씨
    • 후비 왕씨(5남 2녀)
      • 아들: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
      • 딸: 이금서(李金書)[B], 황경(黃瓊)[C]에게 출가
  • 1887년 《김씨 분관록》 - 김창희 근기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8자를 모두 배척
  • 왕자: 덕지(德摯)
  • 1908년증보문헌비고》 - 칙명 간행
  • 계자[30]: 범공[僧名:승명][31][A]
    • 손자: 운발(雲發) - 나주 김씨
  • 별자: 덕지(德摯), 학성부원군 - 울산 김씨
  • 2자: 은열(殷悅)[32], 공부시랑 - 경주 김씨 일파
  • 3자: 영분(永芬) - 경주 김씨 일파
  • 5자: 석(錫), 의성부원군 - 의성 김씨
  • 6자: 선(鐥), 언양군 - 언양 김씨
  • 1924년 《조선씨족통보》 - 윤창현 간행
  • 왕비 박씨(3남 1녀)
    • 태자: 마의태자
    • 계자: 범공[僧名:승명][A]
    • 3자: 영분(永芬)
  • 계비 왕씨 낙랑공주(5남 2녀)
    • 4자(혹은 2자): 은열(殷說)
    • 5자: 석(錫)
    • 6자(혹은 7자): 선(鐥)
[1] 참고로 문성왕의 장인인 공신 김양이 태종 무열왕 9세손이다. 같은 9세손 항렬이지만, 실제 사서에서 등장시기는 약 80년 차이가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적손과 서자의 나이가 비슷했다고 본다면, 경순왕은 서출을 3번 정도 거친 방계 출신으로 추정될 수 있다.[2] 김민공이 김효종의 조부라는 정보는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 족보에만 나타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880년부터 무려 6년 반 동안 시중 직을 역임하였다. 삼국사기 등장 기사[3] 역사에 실명(失名)이라 한다.[A] A B C 울산 김씨 족보에서는 시조이자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에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나오는 김덕지(金德摯)를 범공(梵空)과 동일인으로 보며,《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전비 박씨 소생의 차남 김굉(金鍠)(또는 김황(金湟))이 김덕지와 동일인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와 다수 족보에서는 범공을 경순왕의 계자(季子)로, 김덕지를 별자(別子)로 보아 둘을 구별하고 있다.[4]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죽방부인의 장녀를 덕주공주로 적고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주사 전승에 김덕주(金德周)로 전하고 있다.[5] 장수 황씨 시조. 신라 시중(侍中).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덕주공주의 남편이 황이재(黃以裁) 혹은 황경(黃瓊)이라고 적고 있다. 《신라경순왕전비》에는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차녀와 혼인한 것으로 적고 있으나 연대상 모순으로 죽방부인 소생의 장녀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크다.[6]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1682, 송시열)에 학성부원군 김덕지가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라고 적고 있다. 경주 김씨 세보(1920)에서는 김덕지의 서차(序次)를 알 수 없어 말행(末行)에 적는다고 하였는데 별빈 순흥 안씨가 1남을 낳았다고 하므로 김덕지는 별빈 순흥 안씨의 소생으로 보인다.[7] 別嬪. 혹은 별비(別妃).[8] 경주 김씨 세보(1920)에 별빈(別嬪) 순흥 안씨가 1남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별비(別妃)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1남 김덕지를 낳았다고 적고 있다. 《김은열 묘지명》을 기초로 한 다수 족보에는 김덕지를 8형제 다음에 적고 있고 순흥 안씨는 적고 있지 않다.[9] 반대로 태조는 경순왕의 사촌 누이를 아내로 맞았는데, 바로 신성왕후이다. 따라서 태조에게 경순왕은 사위이자 아내의 사촌이다. 참고로 고려 제8대 현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신성왕후의 후손들이다.[10]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11] 경주 이씨.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 중원태수(中原太守).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 대동보에는 그 배위가 경순왕의 3녀(낙랑공주의 차녀)라고 적고 있다.[12] 혼인 이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혼인 후에는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13] 일단 법적으로 양반과 상민은 모두 양인 계급에 속했다.[14] 1785년(정조 9) 대사헌이었고, 1819년(순조 19) 좌의정을 지냈다.[15] 건립된 것은 신라 멸망 후인 944년(혜종 1)이다. 해석문은 링크 참조.#[16] 링크 하단 판독문 (뒷면) 01-07 金鎰蘇判(김일, 소판) 참조.#[B] A B 경주 이씨.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장남으로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이다. 《신라경순왕전비》 및 경주김씨대동보에는 경순왕의 차녀(후비 왕씨의 장녀)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 및 경주이씨대동보에는 경순왕의 3녀(후비 왕씨의 차녀)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경은 신라 말 시중이었고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연대상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C] A B 장수 황씨의 시조. 신라 시중(侍中). 《신라경순왕전비》 및 경주 김씨 대동보에는 경순왕의 3녀(후비 왕씨의 차녀)가 황경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 및 경주이씨대동보에는 경주 이씨 이금서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경은 신라 말 시중이었고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므로 연대상 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17] 제4자의 오기인 듯하다.[18] 이름의 한자 說(열)을 悅(열)로 오기하였다.[19] 경순왕의 계자(季子: 막내아들) 범공(梵空)의 아들이다. 나주 김씨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20] 季子(막내아들).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아들 중 계자로 봐야 할 것이다. 고려 태조의 장녀인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자녀들은 태어나기도 전일 뿐 아니라 그들이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갈 이유도 없다.[21] 나주 김씨 족보에서는 1887년 김홍집이 《정해보》 후기를 쓰면서 경순왕의 계자(季子)의 이름을 김황(金湟)(《김은열 묘지명》의 제2자)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부터 계자 범공과 김황(金湟)을 동일인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서 김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맞아들인 낙랑공주 소생의 제2자로서 고려 태조의 외손이라 기록되어 있다.[22] 고려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다고 적고 있다.[23] 언양군에 봉해졌다고 적고 있다.[24] 1784년에 발견됨.[25] 여기서는 이제현의 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낙랑공주 왕씨의 딸이 이금서에게 출가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26] 이제현은 고려시대의 대학자로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묘지명은 1375년(우왕 1) 제자이자 대학자인 이색이 찬(撰)하였고, 1394년(태조 3) 각(刻)하였다. 그 내용이 《목은문고》, 《동문선》 등에만 전했으나 2007년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600kg 규모의 거대한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된 바 있다.[27]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이다.[28]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를 맞이하여 낳았다는 자녀들이다.[29] 전비 박씨 소생 3남 1녀[30] 季子(막내아들).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아들 중 계자로 봐야 할 것이다. 고려 태조의 장녀인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자녀들은 태어나기도 전일 뿐 아니라 그들이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갈 이유도 없다.[31] 증보문헌비고에서는 "그 이름이 실전되었다. 신라 멸망 후 머리를 깎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살다 죽었다. 입산 전 운발(雲發)이라는 아들이 있어 나주로 분적하였다."라고 적고 있다.[32] 경순왕의 제4자가 아닌 제2자라고 적고 있고, 이름의 한자 說(열)을 悅(열)로 오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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