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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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관련 항목
4.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簡札. 근대 이전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


2. 내용[편집]


근현대 이전에 사람들끼리 용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한 편지들로 큰 맥락에서 볼 때 간찰의 저술 목적과 내용 구성 등은 현대의 편지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지금의 편지와 같이 봉투에 해당하는 피봉에 편지지를 넣어 보냈으며, 안부 인사와 전할 내용들을 붓으로 적어 보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간찰들은 거의 모두가 조선시대의 것으로,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많은 분량의 고전 편지들이 남아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간찰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양의 간찰들을 만들고 남겨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편지가 이전 왕조나 타국가의 편지들과 달리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이전에는 공무상의 일이나 개인적으로 정말 중요할 때에만 큰맘 먹고 편지를 지어 보냈던 것과는 달리 조선 사람들은 별것 아닌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부 편지로 만들어 부쳤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적으로는 각종 붕당, 가계적으로는 각종 문중들에 의해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각 지역마다 상소문이나 편지, 탄원서, 통발문 등을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이동시키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우 쉽게 간찰을 만들어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조선인들의 특별한 보관 의식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편지 또한 문(文)의 하나로 여겨 편지지 하나하나를 매우 소중히 간직했으며, 한 인물이 사망한 후 그 사람이 평생 쓴 글들을 모아 문집으로 낼 때도 살아생전 그 사람이 썼던 편지 또한 문집의 일부분으로 추가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왕들의 시문들을 모아놓은 열성어제를 보아도 왕들이 지어 보낸 편지들의 내용이 상당수 문집에 추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소한 편지글 하나하나마저 후대에 남겨 자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려는 조선 특유의 사상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문집은 그 수가 너무 많아 문집의 숫자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문집만을 대상으로 한 종합적인 연구도 1982년 단 한번이 마지막이다. 이때 윤남한(尹南漢)이 문집기사종람유별색인(文集記事綜覽類別索引) 작업의 하나로서 잡저기설류기사색인(雜著記說類記事索引)이라는 제목을 달아 당시 윤남한이 조사에 성공한 조선시대 문집 6,000여 종을 정리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현재 학계에서는 이때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42년이 지난 지금은 대략 1만여종의 조선시대 문집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각 문집마다 그 사람이 생전 지었던 간찰의 내용이 수십 ~ 수백여통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분량상 문집에는 담아내지 못한 간찰들 또한 서첩의 형태로 따로 만들어져 다수가 전해지고 있거나 또는 원본이 대를 이어 각 집안마다 전해지고 있다.


3. 관련 항목[편집]




4.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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