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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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
라틴어: Gaius Flaminius Nepos

생몰년도
기원전 260년 ~ 기원전 217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중부 트라시메노 호수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조부)
루키우스 플라미니우스(아버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아들)
참전
제2차 포에니 전쟁
직업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23년
전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동기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후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17년
전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동기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후임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


2. 생애[편집]


기원전 260년경 이탈리아 로마에서 루키우스 플라미니우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평민 출신으로, 아버지 루키우스 대부터 정치에 입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232년 호민관에 선출된 뒤 가장 가난한 시민들에게 피케눔의 정복지(이른바 켈트 들판)를 나눠주는 법안을 입안했다. 원로원켈트족의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반대했지만, 빈농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이때 분배된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약 19,000개의 할당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이 농지법은 스풀리우스 카르빌리아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집정관이던 해인 기원전 228년 플라미니우스가 법무관에 선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입안한 법안의 반발이 상당해서 시행이 4년 늦춰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27년, 로마 역사상 첫 시칠리아 속주 총독에 선임되었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모든 사법 문제를 처리하고, 비상시에는 반란을 임의로 진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30년 후인 기원전 196년, 그의 아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조영관을 맡았을 때, 시칠리아인들은 조영관과 그의 아버지 모두에게 명예를 주기 위해 밀 백만 파운드를 특별히 로마로 보냈다. 이로 볼 때, 그는 시칠리아에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던 것 같다. 로마는 이를 기념하여 이틀 동안 루디 로마니 축제를 성대하게 치렀다.

기원전 223년, 그는 귀족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해 켈트인들이 원로원의 우려대로 로마의 피케눔 식민지화에 심한 위협을 느끼고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출전하였고, 인수브레스 부족과의 결전에서 5만에 달하는 적군을 물리쳤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9,000명의 켈트족이 죽었고 17,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와 필루스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원로원으로부터 즉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로마로 돌아가 집정관직을 사임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리미나시 부근에 달 3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집정관 선거 때 새들의 비행을 관찰한 사제들이 집정관을 잘못 뽑아서 불길한 기운이 로마를 덮쳤다고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 편지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로 귀환한 뒤 민회의 결정에 따라 개선식을 개최했으나, 원로원의 지시에 불복종한 일로 압박을 받고 예정보다 일찍 사임해야 했다.

기원전 221년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휘하에 들어가 기병장관을 맡았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이 선임이 발표된 직후에 쥐들이 '끽끽'하며 우는 소리가 들렸고, 사제들이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하는 바람에 파비우스와 함께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220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의 시민들을 에스퀼리나, 팔라티나, 수부라, 콜리나에 이주시켰고, 북이탈리아에 플라센티아와 크레모나를 식민도시로서 건설했다. 또한 플라미니우스 곡예장을 세워서 시민들이 여흥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플라미니아 가도였다. 로마에서 리미니를 잇는 플라미니아 가도는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지르는 가도로, 로마에서 리미니 까지의 구간을 연결하였다. 로마는 이 가도를 설치함으로써 북이탈리아에 군대를 좀더 쉽게 이동시킬 수 있었고, 자연히 북이탈리아의 켈트족은 로마의 압박을 더욱 심하게 받아야 했다.

기원전 218년, 호민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과 그 아들들의 선박 소유를 제한한 법안을 입안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이를 적극 지지하여 법안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원로원 의원들은 상업이나 무역에 종사하기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원로원의 감정은 상당히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들어와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 전투에서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를 격파했다. 이에 평민들은 플라미니우스를 차기 집정관으로 선출하였고, 귀족 계급에서는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선출되었다. 그는 제비뽑기를 통해 플라센티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셈프로니우스 군대의 지휘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또다시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자신을 붙잡아둘 걸 우려하여 불필요한 의식을 생략한 채 비밀리에 로마를 떠났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르민에 도착하여 셈프로니우스의 4개 군단과 합류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한니발이 더 내려오기 전에 아펜니노 산맥 쪽의 통로인 아레티움(오늘날 아레초)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한편 동료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아드리아 해 연안 가도에 위치한 아리미눔(오늘날 리미니)에 주둔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둘 중 한 곳으로 내려오리라 보고, 한니발이 한 쪽으로 가면 다른 쪽이 즉시 달려와서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아펜니노 강과 아르노 강 주변의 거대한 늪지대를 강행 돌파하여 아렌티움 남쪽의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도착했다. 그는 플라미니우스가 보는 앞에서 수많은 농장과 마을을 약탈하고 방화를 자행해, 요새에 박혀 있는 그가 회전에 응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그는 동료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오기 전에는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적의 도발을 참아냈다. 이에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를 유인하기 위해 아풀리아 지방으로 남하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약탈을 지켜만 본 것에 대해 민중에게 받을 비판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분노로 뒤섞인 감정으로 한니발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리비우스에 따르면, 다른 집정관을 기다려 군을 규합하여 싸울 것을 촉구한 원로원의 권고를 무시하고, 분노에 찬 채 전투를 위한 행군을 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서술은 플라미니우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악의적인 기록이라고 간주한다. 그는 한니발의 앞선 도발을 참아낼 정도로 참을성이 있었고, 이전에 집정관을 맡았을 때 켈트족들을 상대로 완승을 거둘 만큼 군사적 재능도 출중했다. 그런 그가 아풀리아 지방으로 남하하는 한니발을 추격한 건, 한니발이 마음놓고 약탈을 벌이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로마로 직공할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니발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안개가 자욱한 트라시메노 호수 주변 일대에 정찰병을 보내지 않고, 적진의 불빛이 있는 쪽으로 강행군한 것이다. 그는 적이 멀리 떨어져 있을 거라 믿고 호수를 서둘러 지나가려고 했지만, 실은 한니발의 군대가 그 주변 고지대에 매복하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217년 6월 22일,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은 적의 매복에 완벽히 걸려들어 호수에 뛰어드는 것 외엔 퇴로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도와 서약으로 구원받지 않으며, 용기와 힘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검으로 적의 대열을 뚫어라! 두려움이 적을수록 위험도 적으리라."


그러나 전투 개시 수 시간만에 로마군은 궤멸되었고, 플라미니우스는 두카리우스라는 이름의 켈트족 기병이 내지른 창에 맞아 죽었다. 리비우스는 파비우스 픽토르의 현존하지 않은 기록을 참조하여, 이날 로마 병사 15,000명이 전사했다고 밝혔다. 반면 에우트로피우스와 오로시우스는 25,00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천에서 1만 5천 명이 카르타고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의 시신을 찾을 것을 지시했으나, 오랜 수색에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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