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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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대 중국 삼국시대 손오의 인물이며 자는 자산(子山)으로 서주 하비국 동성현 사람.[2]
선조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 극의의 아들 보양으로 식읍으로 보땅을 받아서 성을 보로 바꿨다고 하며, 또한 조상으로 공자의 제자인 보숙승이 있다고 한다.
2. 정사[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보즐은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난리를 피해 고향에서 강동으로 가서[3] 위정이라는 사람과 오이를 심어 자급자족하면서 밤에는 경전을 외웠다고 한다.
그 땅이 초교의 소유라 위정과 함께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이를 진상하러 갔는데, 온갖 멸시를 주며 무시함에도 불구하고 보즐은 "그의 강성함을 두려워해서 왔는데, 여기서 고상한 척 하면서 돌아가면 원수만을 맺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며 위정을 말리고 또 거지나 먹을 법한 밥을 주니 거기서도 "우리들은 가난하고 미천하오. 때문에 주인은 가난하고 미천함으로써 우리를 대우한 것이니, 진실로 마땅한 것이오. 무엇 때문에 치욕스러워 해야만 하오?"라고 말하며 분노한 위정을 말렸다.[4]
2.2. 무관으로서의 면모[편집]
200년 손권이 토로장군이 되자 보즐은 그의 밑에서 주기, 해염현의 장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인해서 사임을 하고 제갈근, 엄준과 함께 오중에서 유학을 하여 이름을 날리다 후에 손권이 거기장군이 되고서 다시 콜을 해 거기장군 동조연이 되었다.
210년에는 파양태수를 겸임했다가, 그 해 중에 교주자사, 입무중랑장으로 전임되었고 곧 지절, 정남중랑장이 더해졌다.
당시 교주는 인망이 높은 사섭과 유표가 보낸 창오태수 오거가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오거는 안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서 겉으로는 보즐에게 복종했다. 이에 보즐은 오거를 불러 단숨에 베어버리니 이 일로 보즐의 명성은 크게 떨쳐졌다. 이에 놀란 사섭은 손권을 따르기로 하고 이어서 사섭의 설득으로 옹개가 익주에서 태수 정앙을 베고 귀의를 청해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 공으로 평융장군, 광신후가 더해졌다.
220년에는 유비가 이릉대전을 준비하자 여대가 보즐을 대신하고 보즐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무릉의 이민족에 대비해 장사의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며, 이민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습진을 반준과 함께 토벌해 기세를 올렸다. 이로 인해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유비에게 호응하지 못하고 유비가 패퇴한 이후에 여전히 서로 놀라게 하고 소란을 피우면서 각지에서 병사로 막아서고 있었는데 전투가 오나라의 승리로 끝나자 모조리 격파했으며,[5] 223년에는 이공으로 우장군좌호군, 임상후가 되었다가 226년에는 부절을 받고 구구로 임지를 옮긴다.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표기장군 기주목[6] 이 되고 서릉으로 가 육손을 대신해서 국경을 지켰지만, 곧 오와 촉 사이에서 위의 영토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기주를 촉에게 할당하기로 해 기주목 자리가 소멸했다.
2.3. 문관으로서의 면모[편집]
당시 무창에 주둔하던 손권의 태자 손등에게 보즐은 당시 형주 경내에서 임무를 맡고 있던 11명[8] 을 나열하고 그들의 행장을 분석해 사람을 추천하였다.
교사 여일이 상소를 남발해 수많은 사람이 붙잡히자 도성의 일은 고옹에게 맡겨야 하고 무창의 일은 육손, 반준에게 맡겨야 하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상소를 올려 여일을 주살시켰으며, 이로 인해 누명을 쓴 사람들을 복원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한 번은 위나라의 투항자인 왕잠이 위나라가 베로 된 주머니에 모래를 넣어 이를 대량으로 양산해 양자강을 막아 진격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자 보즐은 그의 말을 믿고 손권에게 가서 이에 대비해야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손권은 그게 사실이라면 소 수천 마리를 주겠다고 하며 기각하였다.
후에 제갈각과 여범도 보즐의 말을 듣고는 "보즐의 표를 읽을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이 강은 천지 개벽과 함께 태어났는데, 어찌 모래 주머니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손권은 보즐의 의견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았더라도, 항상 그의 건의를 듣고 취하였으며,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아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2.4. 죽음[편집]
이궁지쟁 때는 손패파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246년 9월에는 육손을 대신해 승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아직도 문하생을 두고 책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나 처첩들의 사치가 심해 사람들한테 비난받았다. 배송지는 이궁의 변 당시 보즐의 행각에 대해 '보즐은 덕과 도리를 칭하여 오나라의 대신이 되었음에도 손패에게 아부를 떨고 양공과 같이 일을 도모했으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중략)보즐에게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대, 전종의 무리들도 대개 논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라며 손패파였던 보즐을 극딜했다.
247년에 사망하고 장남 보협이 후사를 이었다. 그런데 보협은 왕기에게 이릉성의 식량을 약탈당하고, 종회와 등애가 죽은 틈에 촉의 빈땅을 공격하러 갔다가 나헌한테 쫘악 털린다. 차남 보천은 진나라에 항복한다. 2세 농사는 망했다. 한당처럼 대표적인 호부견자의 케이스.
3. 연의[편집]
적벽대전 때 처음 등장. 위나라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문관 중 하나로 나와 제갈량과 설전을 할 때는 제갈량이 잘 알려지지도 않은 보즐의 자가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나온다. 이 일로 보즐은 듣보잡이 됨과 동시에 제갈량의 듣보잡의 자도 알고 있는 선견지명과 기억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다.
교주에서 활동하고 있을 217년에는 조조에게 화평하러 가는 사자로 등장하고 219년에도 사자로 조조에게 가서 오나라가 관우를 치기 전에 조인이 먼저 관우를 공격해야만 그에 응하기로 협정을 맺는 역할을 맡는다. 본래 형주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고 유비의 공격에 호응을 막고 있을 이릉대전에서는 육손을 믿을 수 없다며 그의 기용에 반대하는 역할을 한다.
군사를 지휘하며 교지를 정벌하거나 형주의 반란을 진압했던 정사와는 달리 연의가 끝날 때까지 전투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고 제갈량과의 설전에서 발리거나 육손의 능력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백면서생이라는 겉모습만 보고 반대하고 사신으로만 등장하는 등 삼국지연의/피해자의 일원. 그래도 조언을 많이 하고 손권이 이에 따르는 모습을 보면, 마냥 피해자라 보기에도 좀 그렇다.
4. 기타[편집]
돈황의 장경동에서 발굴된 정사 삼국지의 보즐전 잔편. 두루마리의 작성 시기는 동진 시대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이름이 보질[9] 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어서 관우 휘하의 장수였던 조루, 이이와 함께 세트로 등장했던 사정, 정보의 아들로 정보가 적벽대전 때 주유와 함께 총대장에 임명되자 삐져서 대타로 보냈던 정자와 함께 검열삭제 4천왕으로 취급되었으나, 후에 발음이 보즐로 확정되어 알려지면서 해체되었다.
또 손권의 아내 보연사가 그의 일족이라고 한다.
5. 미디어 믹스[편집]
자세한 내용은 보즐/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회음현(淮陰縣)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2] 지금의 안휘성에 속한다. 노숙과 동향이다.[3] 이 루트가 강동이 인구가 크게 늘어난 계기다. 특히 서주대학살 때 많은 사람들이 남쪽의 강동으로 이주했고, 이 중에는 인재도 매우 많았다. 후에 삼국으로 분리되어 평안하자 강동으로의 인구 유입이 뚝 끊겨 손권이 인구를 늘리려고 일본으로도 군대를 보내고 이상한 섬으로도 군대를 보내고 하면서 한 뻘짓을 보면 알 수 있다.[4] 후의 위정도 손오에 임관하게 되나 무릉태수로 있을 때 반준을 모함하다가 면직된다.[5] 이 부분을 보즐전 원서에선 備既敗績,而零、桂諸郡猶相驚擾,處處阻兵,騭周旋征討,皆平之라고 하는데 여기서 '驚擾'가 놀라고 소란스럽게라는 뜻도 있으나 '방해하다, 괴롭히다'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번역할 경우 '유비가 패하고도 영릉, 계양 여러군은 오히려 서로 방해하면서(괴롭히면서) 각지에서 병사로 막아서고 있었다.'라는 뜻이 된다. 현재 인터넷 상 번역으로는 '유비가 참패를 한 후에도 영릉과 계양 각 군에서는 여전히 서로 겁먹고 동요되어 있었으며, 곳곳마다 무력을 기대고 있었다.'라고 번역하는 바 이 번역을 고친 부분을 적되 이설을 기록해 둔다.[6] 사실 오가 통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주를 실효지배하는 위를 불법정권으로 취급하고 오나라 관리로 장관을 삼은 것. 현대 대한민국에 이북5도지사를 두는 것과 유사하다. 아래 위나라 영토 분할도 마찬가지.[7] 손오오의 노장 정보와 동명이인이다.[8] 제갈근(諸葛瑾), 육손(陸遜), 주연(朱然), 정보(程普),[7] 반준(潘濬), 배현(裴玄), 하후승(夏侯承), 위정(衛旌), 이숙(李肅), 주조(周條), 석간(石幹)[9] 騭의 본음은 사실 질이지만 후대에 음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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