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C 우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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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aaf_66.jpg
CAC CA-11 우메라(CAC Woomera)
1. 개요
2. 설계 및 개발
3. 원형기 추락과 손실
4. 생산 시도
5. 제원


1. 개요[편집]


영연방의 일원인 호주에서 1936년에 설립된 국영 항공기 메이커 CAC(Commonwealth Aircraft Corporation)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쌍발 엔진을 갖추고 급강하 폭격과 대지 공격, 어뢰를 이용한 대함 뇌격과 장거리 정찰 임무까지 모두 하나의 기체로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 군용기를 만들기 위해 소매를 걷어부쳤다. 결과적으로 단 2대만 만들어진 이 쌍발 다목적 공격기는 호주 공군(RAAF)에 운용되기 전에 생산이 취소된 실패작이었으나, 호주의 항공산업 발전에 쓰디쓴 약이 되어주었다.


2. 설계 및 개발[편집]


점차 전운이 감돌던 1939년, 호주 정부는 영국에 당대의 신예 쌍발 폭격기 브리스톨 보포트(Bristol Beaufort)를 면허 생산하기를 원해 대량으로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는 영국도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항공기 증산 정책을 시작했던 탓에 브리스톨 본사가 아니라 열차 공장에 하청을 넣은 생산분이 인도될 예정이 잡히게 된다. 호주 현지의 항공기 제조업체인 CAC는 이 생산 과정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고, 호주 정부는 이에 몹시 못마땅했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포트는 호주에서 면허 생산할수 있게 되었지만 브리스톨 사는 생산량이 딸리는 타우러스 엔진은 제외시켰고, 미국제 엔진을 구입해 반조립하는 수준에 그치게 된다.

이런 현실에 반발한 로렌스 웨킷(Lawrence Wackett)이 개발주임을 맡아 이끌던 CAC는 급강하 폭격기뇌격기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데다 영국제 보포트를 능가하는 성능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국산 항공기 설계를 시작했다. 로렌스는 항공기의 성능을 높이려면 중량 감소가 열쇠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엔지니어였다. CAC 개발진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전통적인 자동방루식 연료 탱크 대신 주날개를 지탱하는 구조인 윙 박스를 밀폐 처리하여 그 공간을 연료 탱크로 활용하도록 했다. 엔진은 미국프랫 & 휘트니 사로부터 구입한 1,200마력짜리 트윈 와스프(Pratt & Whitney R-1830-S3C3-G Twin Wasp)를 달아주었고, 동체 내부에는 어뢰까지 실을 수 있는 대형 폭탄창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실물 기체의 제작이 상당 부분 진행될 때까지 호주 정부는 CAC의 계획에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 공군이 영국에 공습을 시작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의 지옥문이 열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자국산 항공기와 부품의 수출을 일체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항공기 부품을 받아서 조립하고 있던 호주는 공장의 일손을 멈추고 손가락만 빨게 된다. 이때가 1940년 여름으로, 아직 공군 관계자들이 CAC의 신형 공격기를 구경도 하지 못했던 때였으나 호주 정부가 먼저 나서서 CA-4로 불리던 프로토타입에 관한 정식 발주를 넣게 된다.

원형기 CA-4는 1941년 9월 19일에 CAC의 시험비행사 후버트 보스-워커(Hubert Boss-Walker)가 혼자 타고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조종사, 폭격수, 무선수 겸 기총 사수 합쳐 3명이 타게 설계된 CA-4는 기수에 기관총 4정이 고정 무장으로 붙어 있었고, 동체 폭탄창에는 500 lb (230 kg) 폭탄 4발이나 어뢰 1발을 탑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공격기의 특징적인 부분을 꼽자면 엔진 나셀 후방에 설치된 원격조작식 방어 총탑일 것이다. 브라우닝 기관총 2정을 묶어 장비된 이 리모콘 총탑은 기총 사수가 비행 중에 전기 모터로 작동시켜 사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웨킷의 윙 박스 연료 탱크는 독일 공군의 항공기들에도 종종 쓰이는 구조였지만, 불행하게도 웨킷 폭격기로 불리던 CA-4는 공작 과정이 미숙해 안정성이 낮았던 모양이다. 1943년에 실시된 시험 비행에서 CA-4의 1호기는 탱크에서 개솔린이 새어나와 흰 꼬리를 끌다가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켜 완전히 파괴되고 승무원들이 사망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CA-11로 재명명된 2호기는 연료 탱크를 철저히 점검하고 꼬리 날개와 방향타를 수정하는 한편, 기수 무장에서 기관총 2정을 빼고 대신 20 mm 기관포 2문으로 화력을 강화하는 개량이 더해졌다.


3. 원형기 추락과 손실[편집]


1943년 1월 15일에 CA-4의 1호기 A23-1001는 엔진 성능과 새로운 고정식 날개 앞전의 공력 효과를 평가하기 위한 시험 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다. 시험 스케쥴을 마치고 비행장으로 돌아가던 기장 짐 하퍼(Jim Harper) 소령은 왼쪽 엔진에서 연료가 누출되는 증상을 발견했지만 적절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하퍼 소령은 엔진을 끄고 프로펠러를 페더링시키려고 스위치를 전환했다. 그 순간, 엔진에서 불길이 확 일며 동력을 잃고 말았다. 3명의 승무원은 고도 300 m까지 추락하면서도 계속 탈출을 시도해 하퍼 소령은 간신히 낙하산 강하에 성공했지만, 부조종사 짐 카터(Jim Carter) 대위와 엔지니어 라이오넬 듀건(Lionel Dudgeon) 두 사람은 기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 사망하고 말았다. 기체는 킬모어 남서쪽 4.8 km 지점에 추락했고, 회수된 잔해는 성한 부품을 골라 재활용되었다.


4. 생산 시도[편집]


1941년 12월에 일본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호주도 크나큰 위기를 마주하게 되자, RAAF는 테스트가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CAC의 계획을 받아 1942년 3월 8일에 105대의 CAC 폭격기를 주문했다. 그러나 원형기인 CA-4가 기체 이상에서 비롯된 사고로 손실되고 개수된 CA-11는 1944년 6월까지도 비행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CAC 공장에서 모든 점검과 시험을 끝내고 비로소 생산이 준비되어 있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는데다, 전투기의 요격에 취약한 급강하 폭격기는 이제 실전에서는 통하지 않는 낡은 구식 무기로 전락해 있었다.

이즈음 RAAF의 경폭격기 / 정찰기 / 공격기 역할은 영국이 탄생시킨 브리스톨 보파이터가 가져가 버렸고 미국으로부터는 B-24 리버레이터 같은 중폭격기도 원조받고 있었다. 한때 호주 공군의 구세주로 여겨졌던 우메라 폭격기는 이제 실전에서 검증도 안된 그저 그런 성능의 흔해 빠진 쌍발기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정부의 수주량도 뚝 떨어져 원래의 105대에서 20대로 삭감되었다. 첫 번째 CA-11이 비행을 마치자 호주 공군은 개발 계획 전체를 취소하고 CAC에 준비된 우메라 생산 라인은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 전투기를 만들도록 전환되었다.


5. 제원[편집]


초도 비행 : 1941년 9월 19일
승무원 : 3명
전장 : 12.07 m / 전폭 : 18.05 m / 5.53 m
익면적 : 40.9 m²
중량 : 5,798 kg ~ 10,402 kg
동력 : 프랫 & 휘트니 R-1830-S3C3-G 공랭식 성령 엔진 (1,200 hp) 2기
최대속도 : 454 km/h
상승고도 : 7,165 m
항속거리 : 3,580 km (증조 및 어뢰 1발 탑재시)
상승률 : 10.6 m/s
고정 무장 : 브라우닝 기관총 2정 / 20mm 이스파노 MkII기관포(기수) / 브라우닝 기관총 4정(원격 조작) / 빅커스 K 기관총 1정(동체 하부)
탑재 무장 : 250~500 lb 폭탄 4발 또는 GB Mk XII 어뢰 1발
생산수 :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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