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타 미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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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타 미에코
弘田(ひろた三枝子(みえこ | Mieko Hirota


파일:mico05.jpg

본명
竹永(たけなが三枝子(みえこ (타케나가 미에코)
출생
1947년 2월 5일
도쿄도 세타가야구
사망
2020년 7월 21일 (향년 73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데뷔
1961년 11월 1집 앨범 '子供ぢゃないの'
레이블
파일:NipponColumbia.png
서명
파일:히로타 미에코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경력
3. 수상
4. 평가
5. 주요 곡



1. 개요[편집]



일본가수이다.

가창력과 펀치가 있는 노랫소리로 서양 음악을 커버한 일본팝을 불러 히트를 쳐 일본 R&B 딸로도 평가받았다.
후의 뮤지션(미야코 하루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야마시타 타츠로, 타케우치 마리야, 쿠와타 케이스케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재즈로 단련한 스캣을 잘했고 정해진 코드 안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미리 정하지 않고 스릴을 느끼며 즉석에서 스캣을 노래하며 즐겼다고 한다.
말년까지, 빈 시간에 최신곡을 iPod로 찾아 듣는 등, 채용해,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2. 경력[편집]


세타가야 구립 미주쿠 초등학교의 학생이었던 무렵부터 극단에 들어가 유치원의 무렵 FEN의 라디오에 매료되어 가수가 되는 것을 결의. 어머니의 도움 아래, 7세 무렵부터 스스로의 의사로 「일본 재즈 학교」에 주 1회 버스로 다니며, 영어 발음의 기초로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아, 8세부터 진주군의 캠프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고마자와 학원 여자 중학교의 1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진주군 캠프 에서 재즈 등을 노래하고 있었다. 곡을 제공받아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집에서의 연습때 가사를 이해하고 멜로디를 몸에 넣고 나서, 스스로 고안한 기호를 악보에 기재한 뒤, 스스로 가창한 테이프를 확인해 노래를 완성한 뒤 수록에 임했다고 한다. 이 방식은 레코드 데뷔부터 마지막 싱글 수록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965년 Miko In New York 앨범에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바비 햅의 Sunny의 오리지널 버전을 부르기도 하였다.

컴백 때, 히로타는 다이어트에 의한 대폭적인 체중 감량을 하였고, 이 경험을 근거로 1970년에 「미코의 칼로리 BOOK」을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예인의 다이어트 책의 선구자」, 「탤런트 다이어트 책의 원조」라고 평가되어 150만부를 넘었다고도 말해진다. 같은 해는 베스트 드레서상을 수상했다. 이 후, [[입생로랑]과 타이업해, 패션 리더로서도 활약해 나가게 되었다.

후의 일이 2019년 11월 28일NHK에서 방송된 「ネーミングバラエティー 日本人のおなまえっ! (네이밍 버라이어티 일본인의 배꼽!)」의 「ストレスの原因?単位のお名前 (스트레스의 원인?단위의 이름)」의 회에서, 「칼로리」 라는 말을 일본에 보급시킨 인물로서 소개되었다.

그 후, 도미해 1977년에는 뉴욕에서 앨범 「Mieko In New York」을 자체 제작, 다시 현지에서 결혼, 딸을 출산해 어머니가 되었다가 1979년 9월 귀국해 가수 활동을 재개하고 1980년에는 스스로 작곡한 싱글 「ミスターシャドー (미스터 섀도우)」을 도시바 EMI로부터 발매했다.

1983년에는 킹레코드로 이적해, 앨범 「TOUCH OF BREEZE」나 싱글 「사랑의 NO KORIGA」등을 발표한다.


3. 수상[편집]


수상 연도
시상
부문
작품
1969
日本レコード大賞 (일본 레코드 대상)
가창상
「人形の家 (인형의 집)」
1970
東京国際歌謡音楽祭 (도쿄 국제 가요 음악 축제)
"
「できごと (사건)」
1973
チリ・ポピュラー音楽フェスティバル (칠레 퍼퓰러 페스티벌)
5위

2020
日本レコード大賞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공로상


4. 평가[편집]


소설가 코바야시 노부히코는 전후 17년은 헛되지 않았다 대천재라며 히로타에게 찬사를 보냈다.

1991년 발행된 평론책 『日本のポピュラー史を語る (일본의 대중사를 말하다)』에 따르면, 「서양 리듬·멜로디 라인과 일본어 언어로서의 전달 능력의 문제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영어다운 일본어를 생각해 냈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나 재즈등 장르의 울타리를 넘은 노랫소리를 평가받은 반면, 가창 스타일의 변화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견해를 보이는 경향도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히트곡이 나오지 않았던 점 등에서 활동 후기에는 소규모 라이브가 메인으로 미디어 노출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부고 시 방송국 젊은 제작자가 그녀의 존재를 잘 모르고 화제로 거론하지 않는 판단을 한 와이드쇼도 있었다. 다룬 스포츠지 등도 스캔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추모 메시지를 보낸 인물도 거의 60대 이상으로 한정됐다.

야마시타 타츠로 - 전후 최고의 역량을 가진 가수 중 한 분인데 이런 시대도 있을 수 있을까요, 언론에는 거의 올라가지 않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라고 추모하며 미디어가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히로타가 커버로 부른 노래중 「悲しきハート (슬픈 하트)」에 대해서는, 오리지날 가수보다 「훨씬 뛰어난 버전.16세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가창력」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쿠와타 케이스케 - 존재 자체가 팝. 비트감 가득한 팝으로 웃는 얼굴·댄스를 TV 화면 가득 표현하고 있었다. 차밍에서 모두의 동경으로 어쨌든 넘버원이었다.(일련의 커버곡은) 밝은 미래로 향하는 안샘 같았다.

나카오 미에 - 같은 시기에 데뷔한 동지. 엄청난 파워로, 이 사람에게는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히로타 노래 중 (人形の家 (인형의 집))에서는 펀치가 없어졌다.

키쿠치 후미히코 - 「만약 히로타 미에코가 없었다면, 전후 팝은 몹시 지루했을 것이다」

이러한 히로타에 대한 부고 시 미디어의 대응에 대해, 아무런 리스펙트도 없다고 업신여긴 츠즈키 코이치는, 자신의 프로그램 「SUPERDOMMUNE 都築響一のスナック芸術丸 (츠즈키 코이치의 스낵 예술마루)」에서, 2020년 8월 13일에 7시간이나 걸치는 추모 특집을 짜기도 하였다.


5. 주요 곡[편집]




人形の家 (인형의 집)


ヴァケーション (VACATION)


渚のうわさ (물가의 소문)


子供じゃないの (어린애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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