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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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롤로그: 인류의 새로운 의제
3. 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4.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5.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6. 평가
7. 기타


1. 개요[편집]


호모 데우스. 이것이 진화의 다음 단계다.

2017년에 발간된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의 후속작 느낌이 강하다. 사피엔스에서 저자는 인류가 세 번의 혁명(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통해 지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해서 실권을 잡은 인류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를 논한다

2. 프롤로그: 인류의 새로운 의제[편집]


저자는 지금까지 인류의 가장 큰 적이었던 기아,역병,전쟁이 현대 인류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아: 현대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기아가 그다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정치적 기아 제외) 천재지변에 의해 생물학적 빈곤선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국제기구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기에 예전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역병: 과거의 스페인 독감,페스트같은 대역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만일 일어나더라도 각국 정부는 ‘신의 섭리다’ 하며 체념하지 않고 ‘누구의 무능 때문에 방역체제가 붕괴되었는가?’를 따질 것이다. 그 결과 이후 다시 한번 전염병이 닥쳐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지만, 인류는 그것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1][2]
전쟁: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전쟁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핵무기의 발달은 세계대전을 집단 자살과 같은 짓으로 만들어놓았고,[3] 이 때문에 최근의 대기업 임원, 대통령은 정책을 세울 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을 뿐더러, 자본의 정보화는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현대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국가들은 대부분 석유, 희귀 광물 등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먹고사는 국가들끼리 벌어진다.
위 내용들은 사피엔스에서도 한 번 언급한 내용이라 전작을 읽은 독자가 보기엔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모 데우스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질문을 제시한다.

기아, 역병, 전쟁을 관리할 수 있게 된 인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게 될까? 저자는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라고 한다.

1. 불멸
21세기의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다. 과거와 달리 죽음은 더이상 형이상학적 신비가 아니다. 중세 동화는 죽음의 과정을 커다랏 낫을 든 사신이 찾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암세포, 대동맥의 지방 찌꺼기 등 어떤 기술적 결함으로 죽으며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인 해법이 존재한다. 아직 과학자, 의사 대부분은 불멸에 대한 노골적인 꿈과 거리를 두고 그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것이라고 말하지만 노화와 죽음은 결국 그러한 특정한 문제의 결과이므로 의사와 과학자들의 연구는 노화와 죽음을 해결할때까지 멈출 수 없다.
죽음을 극복한 인간은 역사상 가장 불안한 사람들일 것이다. 생명에 만료일이 없는 초인간은 여전히 전쟁이나 사고로 죽을 수 있다. 사람들이 매일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아주 작은 사고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저자는 불멸에 대한 도전에 부정적인 의견도 제시한다. 사실상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인간의 자연 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했으며 암, 당뇨병 등 주요 사망원인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90세까지 산다는 뜻일 뿐이다. 자연수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고 우리가 이를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2. 행복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사후세계는 없으며 행복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설파했다. 고대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거부했지만 오늘날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기본전제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은 행복할 자연권이 있다고 믿는다.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것만으로는 높은 행복도를 달성할 수 없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의 자살률이 전통사회보다 훨씬 높다. 심리적 수준에서 보면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다. 인간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 만족하지 않고 실제와 기대가 일치할 때 만족한다. 조건이 나아질수록 기대가 부풀어오르기 때문에 조건이 현저히 좋아진다고 해서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행복을 결정하는것은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이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승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가 아니다. 오직 몸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감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과학의 설명처럼 행복이 실제로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에 달려있다면 영구적인 만족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성장, 사회개혁 따위가 아니라 그 기제를 조작하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과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그들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것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기분저하와 우울감에 대처하기 위해 그런 약을 먹는다. 미래 인류는 끊임없는 쾌락을 경험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것이다.

3. 신성
인간이 행복과 불멸을 추구한다는 것은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에서 죽음과 고통을 기술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몸을 재설계해 장기, 감정, 지능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기껏해야 돌칼 정도를 만들던 호모 에렉투스가 컴퓨터와 우주선을 만드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데에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뇌구조의 작은 변화로도 충분했다. 생명공학자들이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를 고치고 뇌 회로를 바꾸고 생화학 물질의 균형을 바꾼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기존 신기술은 인간의 마음과 욕망을 바꿀 수 없었으나 인간의 성능을 높이는 기술은 인간의 마음과 욕망을 바꿀 수 있으므로 현재의 마음과 욕망을 소유한 우리로서는 그 변화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기존의 역사는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격변으로 가득하지만 인류 그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도구와 제도는 성경시대와 전혀 다르지만 마음의 심층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공자의 책 등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기술로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 할 수 있을 때 인류역사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3. 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편집]


1.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믿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동물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런 생각의 근원은 농업혁명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농업혁명 전 수렵채집인들은 자기들을 우월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애니미즘을 믿었고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나누는 본질적 간극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농업혁명으로 인해 가축들이 탄생했다. 인간은 동물과 생존경쟁하는 관계에서 동물을 이용하고 통제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에 발생한 유대교와 같은 유신론적 종교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새롭게 성립된 관계를 설명했다. 애니미즘 종교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수많은 등장인물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신 - 인간 - 동물을 구분하여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을 통제하고 이용할 정당성을 제공했다.
과학혁명으로 인해 신 - 인간 - 동물로 구성된 세계관에서 신이 지워지게 되었다. 농경시대의 농부는 더 많은 수확량을 위해 신에게 기도했지만 현대의 인간들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유전학을 연구한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4]를 탄생시켰다. 인본주의 종교는 인간은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동물을 가축으로 부릴 자격을 부여했다고 설명하지만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필요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2.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근거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다른 동물들의 생명보다 훨씬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왜 인간이 특별한지에 대해 전통적인 일신교는 인간만이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동물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진화론이 영혼의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인데 진화는 모든것이 점진적인 변화의 누적이라고 설명하므로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다른 주장은 인간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영혼과는 달리 마음은 구체적인 실제이다. 믿음의 대상인 영혼과는 달리 의식의 흐름은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이므로 의식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로봇과 컴퓨터에게 의식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동물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의식하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는 불확실하다. 현대 생명과학은 동물에게도 감각과 감정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이론들은 감각과 감정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생화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하므로 주관적 의식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아직 아는 것이 적다'이다. 이 파트에서는 마음이 어떤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없지만 여러가지 접근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흥미로운 시각은 생명과학이 문제를 잘못된 각도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유기체의 행동을 데이터 처리과정과 알고리즘에 비유한다. 19세기 과학자들은 마음을 마치 증기기관인것처럼 비유했다고 한다. '욕구를 억제하면 압력이 쌓이고 이러한 압력을 공격성으로 분출한다.'는 식이다. 지금도 흔히 스트레스가 점점 쌓이고 발산하지 않으면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마음의 작동방식을 증기기관에 비유하는것이 유치해 보이는 것처럼 인간심리를 컴퓨터 알고리즘로 설명하는것은 순진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마음으로 인간의 특별함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실에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분명 특별한 동물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한 특별한 능력은 도구제작이나 지능이 아닌 대규모 협력 능력이라고 한다. 이 주장은 전작인 사피엔스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특별함에 대한 증거는 영혼이나 의식에서 찾을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은 우연히 얻게 된 상호주관적 실재를 통한 대규모 협력 능력 덕분에 다른 동물들을 누르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 개개인은 전혀 신성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3. 상호주관적 실재의 중요성
100달러를 상대방과 나누어 가지게 하는 게임에서 고전경제학 이론은 상대방에게 1달러를 제시하고 자신은 99달러를 가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상대방이 얼마를 가지든 1달러라도 이득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낮은 액수의 분배 제안을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진화심리학은 사람들이 불공평한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호구가 되지 않는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의 행동을 연구할 때에는 진화적 알고리즘에 따른 설명이 잘 적용된다. 그러나 대규모 집단의 행동을 관찰하면 전혀 다른 현실을 보게 된다. 과거 대부분의 왕국은 매우 불평등했지만 사회체제는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들은 재화를 독점하는 왕과 귀족들을 상대로 거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즉 대규모 집단의 인간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상호주관적 실재를 고려해야 한다.
저자는 실재를 세가지 개념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객관적 실재는 중력처럼 우리의 믿음이나 느낌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관적 실재는 개인적인 믿음과 느낌에 의존하는 것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여러 사람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돈은 객관적으로는 가치가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므로 현실에서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상호주관적 실재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인간의 역사는 상호주관적 실재들의 변화이다. 중세 문명에서 청년들이 십자군 원정에 자원하는것은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신을 위해 싸우는 자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원칙이 강력한 상호주관적 실재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서 이교도와 성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대의 어떤 청년이 난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겠다고 결심하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 반대로 중세였다면 먼 나라의 이슬람교도들을 보호하겠다는 청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사람들의 믿음 속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와 인권도 특별한 것이 아닌 역사에 존재해왔던 수많은 상호주관적 실재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들도 백년 뒤의 사람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4.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편집]


4장 ‘스토리텔러'
4장에서는 상호주관적 실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설명한다.

먼저 고대 수메르인들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호주관적 실재인 신화를 통해 집단이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고대의 신들을 현대의 기업과 비유하는데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재산(토지)을 소유하고 직원(성직자)을 고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한다. 죽지 않는 신은 점점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더 많은 성직자들을 고용하여 결과적으로 복잡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의 문명은 일정 규모 이상 확대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와 돈이 발명되기 전에는 복잡한 행정문제를 모두 사람의 두뇌로 처리해야 했고 개인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인류가 문자와 돈을 발명한 이후에야 거대한 왕국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사회는 수많은 서류로 구성된 거대한 알고리즘이 되었다고 한다. 문자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알고리즘의 한 단계일 뿐이며 대부분의 결정은 알고리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문자로 인해 인간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허구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현실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가 도리어 현실을 고쳐쓰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저자는 4장 마지막에서 상호주관적 실재들의 힘은 강력하지만 허구와 실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돈, 국가, 기업과 같은 허구적 실체는 인간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지만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표나 평가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흔히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그런데 국가는 우리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가는 우리를 돕기 위해 발명한 도구인데 왜 그 도구를 위해 생명을 희생해야 하냐고 질문한다.

5장 ‘뜻밖의 한 쌍’
5장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가 함께할 수 없는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대부분 종교를 잘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 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 종교를 믿는자에게 그가 믿는 종교가 '미신'일 수 없으며, 초자연적인 힘이라는것은 그러한 힘이 없이도 모든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종교인에게 자연현상은 종교의 교의를 참고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가 신에 대한 믿음도 아닌 이유는 신이 없는 종교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교란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바꿀 수 없는 어떤 도덕법 체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모두 종교라는 것이다. 유대교, 힌두교 등 신이 존재하는 종교에서 도덕법 체계는 신이 창조한 것이고 불교나 도교에서는 신이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원래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일 뿐이다.
저자는 따라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힌두교 등 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또한 하나의 종교라고 한다. 자유주의에서 믿는 보편인권사상 또한 인간이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고 이에 대한 답을 주지만 이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지침은 종교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며 과학은 사실에 대해 연구하고 종교는 가치에 대해 말하면 될 뿐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과학의 경우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종교가 사람들에게 주는 지침에는 윤리적 원칙 외에 필연적으로 사실적 주장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낙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는 '수태되고 단 하루가 지났어도 절대 낙태해서는 안 된다.' 라는 실질적 지침을 제공한다. 이러한 실질적 지침을 분석해 보면 해당지침은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라는 윤리적 판단과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 시작한다'라는 사실적 진술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 윤리적 판단은 과학이 참견할 수 없지만 사실적 진술에 대해서는 과학이 반박할 수 있다. 즉 종교가 제공하는 실질적 지침들에는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적 진술은 과학의 결론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에서 과학을 떼어낼 수 없다고 한다.

흔히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론적으로는 종교와 과학 모두 진리를 추구하므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종교와 과학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종교와 과학 모두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현실에서 종교는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것에 있다. 다른 한편 과학은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종교인과 과학자 개개인은 진리에 관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종교와 과학은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추구한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충돌하지 않고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사는 과학과 인본주의라는 특정 종교 사이의 계약 과정이라고 한다. 과학은 인간에게 힘을 주었지만 반대급부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우주가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우주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새로운 교의를 발명하면서 과학이 주는 힘을 누리면서도 사회질서 붕괴라는 혼란을 피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6장 근대의 계약
근대 이전에는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 또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창조한 장대한 각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각본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인간의 힘을 제약하기도 했다. 근대 이전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미래의 성장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 자연시스템은 평형상태로 존재한다. 날씨에 따라 변동은 있겠지만 같은 경작지에서 생산량이 1년에 3%씩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근대 이전 사람들은 세계를 고정된 파이로 보았다.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것은 성장에 대한 믿음이다. 근대 이후 사회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장이 수많은 문제의 해결법이라고 믿는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반대급부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무너트렸다. 과학은 우주에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을뿐만 아니라 계획도 목적도 없으며 우리는 우주속의 작은 점에 불과한 어느 행성에서 아주 잠깐 머물다 갈 뿐이라고 한다. 과학은 인류에게 힘을 제공했지만 존재의 의미를 박탈한 것이다. 이를 저자는 '근대의 계약'이라고 한다. 바로 '인류는 힘을 얻는 대신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7장 인본주의 혁명

7장에서는 인류가 인본주의를 통해 과학이 제공하는 힘을 누리면서도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근대 이전의 종교들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신 또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내적 경험이 인간의 삶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창조해낸다. 인본주의 혁명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선, 정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본주의는 선, 정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라고 가르친다. 인본주의 윤리의 근원은 인간의 감정이다. 인본주의에서 살인이 나쁜 것은 신이 '너희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인이 피해자와 그 가족, 친구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본주의를 세 가지 분파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 자유주의
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 사회주의
 진화론적 인본주의 – 원론적인 나치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인간은 유일무이한 독자적인 경험을 소유하는 개인이므로 각 개인이 저마다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에게 세계를 경험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고 본인의 진면목을 표현할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개인, 민족, 국가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도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 원천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나와 내 감정만이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느끼고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충돌하며 생기는 갈등은 오히려 진화의 원동력이며 다툼에서 승리하는것이 더 가치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화론적 인본주의에서 전쟁은 가치있는 것이고 심지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 세 가지 분파를 구분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든다.

사례1: 한 음악학 교수가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을 듣고 있다. ‘’빠바바밤!’’ 하는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빠바바밤!’’
사례2: 1965년, 무스탕 차 한 대가 태평양 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 젊은 남성이 척 베리의 음반을 틀고 볼륨을 최대로 높인다. ‘’Go! Go! Jonny! Go!’’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Go! Go! Jonny! Go!’’
사례3: 콩고 열대우림의 깊은 숲속에서 피그미족 사냥꾼 한 명이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다. 그는 근처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성년식 노래 합창을 듣고 있다. ‘’예 오, 오. 예 오, 에.’’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예 오, 오. 예 오, 에’’
사례4: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캐나다 로키 산맥의 어느 곳. 늑대 한 마리가 언덕 꼭대기에 서서 발정기 암컷의 하울링을 듣고 있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늑대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각 사상에게 이 네 가지 사례들이 중요한 정도를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 운전자 = 콩고 사냥꾼 > 늑대
 인간의 경험은 모두 동등하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는 인간이 아니므로 늑대의 경험은 가치가 떨어진다.
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운전자, 콩고 사냥꾼 > 늑대
 사회주의자들도 늑대의 경험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는 점에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지만 다른 세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음악의 진정한 가치는 개별 청자의 경험이 아니라 그 음악이 타인들과 사회 전체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진화론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 운전자 > 콩고 사냥꾼 > 늑대
 그들도 인간의 경험이 동물의 경험보다 중하다는 것은 시인한다. 그러나 인류도 진화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늑대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의 문화들 가운데서도 일부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수준이 높다. 인간 경험에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1914년부터 1989년까지 인본주의 세 분파 사이의 살벌한 종교전쟁이 계속되었다고 표현한다. 처음에는 자유주의가 패배하는것처럼 보였다. 공산주의 정권과 파시스트 정권이 수많은 나라들을 장악했고 나치즘이 장악한 독일은 자유주의 국가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동맹을 맺고서야 독일의 나치즘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1970년 세계에는 130개의 독립국가가 있었지만 그 중 30개 국가만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이 시기에는 자유주의 진영의 열세가 명확해 보였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보다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고 한다. 상호확증파괴 전략이라는 방패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킬 수 있었고 이후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생산성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압도하면서 최종적으로 자유주의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이렇다 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21세기에 일어날 기술혁명은 인본주의의 근간을 흔들것이며 새로운 종교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말한다.


5.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편집]


8장 실험실의 시한폭탄
이 장에서는 자유주의 근간을 흔드는 과학의 최신 발견들을 다룬다.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사실적 진술이다. 이 사실적 진술은 20세기에는 타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의 블랙박스 안에는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것은 없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실재들과 똑같은 물리, 화학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뿐이다. 뉴런 하나가 발화해 전하를 내보낼 때 그것은 외부자극에 대한 결정론적 반응이거나 아니면 방사성 원자의 자발적 붕괴 같은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일 것이다. 어느 쪽도 자유의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자유의지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애초에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선택 이전에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것을 실험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원하는 스위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가 실제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심지어는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기도 전에 과학자들은 피실험자의 뇌 신경 활성을 보고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예측할 수 있었다. 피실험자가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뇌신경 활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자아'라고 불리는 내적 본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는 의식의 흐름만 존재하고 욕망은 그 흐름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욕망을 소유하는 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 욕망을 결정론적으로 선택하는지, 무작위로 선택하는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지 묻는것은 무의미하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하는것은 단순한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약물, 유전공학,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이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단일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찬물 실험'을 통해 저자는 적어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우리 안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로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순간순간의 의식이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야기하는 자아의 특징은 경험의 지속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정점-결말 법칙'을 채택한다는 점이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 중에서 정점과 마지막 순간만 기억해 둘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를 평가한다.

9장 중대한 분리
이 장에서는 자유주의 철학을 무너트리는 과학의 발견들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지를 살펴본다.

* 21세기에 전개될 세 가지 실질적인 상황
1.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을 것이고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은 인간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2. 시스템은 인간에게서 집단으로서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 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3. 시스템은 일부 특별한 개인들에게서 가치를 발견할 테지만 그런 개인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초인간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일 것이다.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이 된 것은 그 철학적 논증이 한치의 오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것이 실질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산업현장에서 개개인은 저마다 가치가 있었다. 보편적 권리가 보편적 징집이 명해진 때와 같은 순간에 선포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면 그들의 동기와 진취적 정신이 고취되고 이는 전쟁터나 공장에서 유용하다.





6. 평가[편집]





7. 기타[편집]


  • 동방귀형수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책이기도 하다. 지배력을 잃은 인간들의 영혼들이 배경설정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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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로나19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00여 년 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 팬데믹 당시 사망자는 2천만명에서 5천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시보다 세계 인구가 수 배 증가하고 교통의 발전으로 전염병 전파에 유리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2021년 기준으로 코로나19에 의한 사망자는 수백만명 수준이다. 아직 팬데믹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백신 접종이 개시되었기 때문에 누적 사망자가 급격하게 증가할 가능성은 낮다.[2] 책의 본문에서도 21세기에 치명적인 유행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언급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그런 사태가 발생해도 과거와는 달리 인류가 신에게서 구원을 찾지 않고, 인간 사회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할 것이라는 점이다.[3] 저자는 <사피엔스>에서 이를 가리켜 팍스 아토미카로 칭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4]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