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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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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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혜통(惠通)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승려로 해동진언종(海東眞言宗)의 개조(開祖)이다. 『삼국유사』 이외에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승려로 모든 것이 베일이 쌓인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씨족에 대한 기록이 없어 매우 낮은 신분 출신임을 추측할 수 있다.


2. 전승[편집]


혜통은 소년 시절 경주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동구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한 마리 수달을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다음날 새벽에 가보니 뼈가 사라져 있어 즉시 땅에 떨어진 핏자국을 따라가니, 수달의 뼈가 자기가 살던 동굴에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있었다. 혜통은 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크게 뉘우치다가 마침내 출가하여 법명을 혜통이라 하였다.
이후 당나라에 들어가 무외삼장(無畏三藏, 또는 선무외(善無畏), 637 ~ 735)의 인결(印訣)을 얻고자 했으나 우이(隅夷, 동쪽 오랑캐) 출신이라 비하하며 거절하였다. 화가 난 혜통은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뜰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정수리가 터지며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무외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니 상처가 아물었다. 그러자 왕(王)자 모양의 흉터가 생겨났다. 이후 무외삼장은 혜통을 인정하여 인결을 전해주고 혜통은 왕화상(王和尙), 왕스님으로 불렸다.

그 때, 당나라 황실에 공주가 병이 나서 당 고종(高宗)은 무외삼장에게 치료를 청했다. 무외삼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은 공주의 병이 교룡(蛟龍)의 짓임을 알아채고 다른 곳에 거쳐하면서 흰 콩 한 말을 은사발에 넣고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콩 들이 흰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되어 공주를 덮친 병마들과 싸웠다. 그러나 흰 갑옷 병사만으로는 병마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혜통은 즉시 금 그릇에 검은 콩 한 말을 넣고 주문을 외어 검은 갑옷 병사를 불러내었다. 신병들이 마침내 병마를 쫒아내자 교룡이 신라 문잉림(文仍林)으로 달아나 버렸다.

신라로 달아난 교룡은 인간들을 마구 해치기 시작했다. 이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정공(鄭恭)이 혜통에게 전하였고, 혜통은 문무왕 5년(665년)에 신라로 돌아와 또다시 교룡을 쫒아냈다. 이에 교룡은 정공에게 원한을 품고 정공의 집 문밖에 버드나무가 되어 자라났다. 정공은 교룡임을 알지 못하고 버드나무의 무성함을 보고 매우 좋아하였다.

그 후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왕의 무덤)을 닦고 장례길을 트고 있었다. 그러나 길가에 정공의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베어내려 하였다. 정공은 뛰쳐나와 차라리 자기 머리를 베라며 화를 내자, 왕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버렸다. 정공을 홀려 죽게 만든 교룡은 곧바로 기장산(오늘날의 불광산)으로 달아나 버렸다.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정공과 친분이 있는 혜통이 정공의 복수를 하려 할 것이므로 마땅히 혜통도 잡아들여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효소왕은 병사들을 보내어 그를 잡게 하였고, 혜통은 이 모든 것을 왕망사(王望寺)에서 지켜보았다. 병사들이 몰려오자 혜통은 사기병과 붉은 붓을 가지고 법당의 지붕에 올라가 병사들에게 자신을 보게끔 외쳤다. 그리고 혜통은 병목에 붉은 금을 긋고 나서 병사들로 하여금 서로의 목을 보라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 전원의 목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혜통이 자신이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들의 목도 모두 떨어질 것이라고 소리치자 이에 병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궁궐로 달아나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왕에게 보였고, 왕은 혜통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당할 수 있겠냐며 체포를 포기하였다.

어느 날, 왕녀가 병이 나자 이번엔 치료를 위해 혜통을 불렀다. 혜통이 왕녀의 병을 낫게 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자 혜통은 교룡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정공의 이야기를 하였다. 왕은 이를 듣고 뉘우치며 정공의 처자들의 죄를 면해 주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혜통은 숙적인 교룡을 추격해 기장산으로 들어갔다. 웅신(熊神)이 되어 백성들을 해치고 있던 즉시 교룡을 달래고 불살계(不殺戒)를 가르치니 그제야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이후 교룡이 숨어있던 청룡등(靑龍嶝) 기슭을 헐어 장안사(長安寺)를 지었다.

또한 혜통이 신문왕을 처음 만났을 때, 주문을 외어 신문왕의 등창을 치료하였다. 혜통은 신문왕에게 전생에 재상으로써 신충이라는 선량한 백성 하나를 잘못 재판해 종으로 삼았던 업보를 알려주었다. 이로 인해 신충이 앙갚음으로 왕에게 등창을 앓게 했다며 신충을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당부했다. 신문왕은 그 말을 따라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를 지었고, 낙성식이 있던 날 하늘에서 신충이 왕에게 감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후 신충봉성사는 신라 조정에서 발원한 사천왕사, 봉덕사 등과 같이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는 주요 사찰로써 존속하게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