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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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젊은 청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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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60대 할아버지가 되었다.


"지금 나는 여기에 인간으로서 처음 서있다."


Hermann Buhl
(1924년 9월 21일 ~ 1957년 6월 27일)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산악인

낭가파르바트, 브로드피크의 초등자.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그리고 가장 위대한 산악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 세계 최초로 2번의 8000m봉을 등정한 인물이며 쿠르트 디엠베르거[1]와 함께 유이한 8000m급 2개봉 초등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위대한 것은 단지 2개봉 초등자였기 때문이 아니고... 악마의 산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초등했기 때문이다.


2. 상세[편집]


그는 4형제 중 막내로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다. 4살때 그의 어머니를 여읜 불은 한 때 고아원으로 보내져 키워지기도 했다.

14살 때 등반을 시작한 불은 티롤, 돌로미테 등지에서 등반을 배웠고 몇 년 지나지 않아 6급[2]을 등반할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 2차대전에 참전하여 미군에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가 종전 후 등반가이드로 활동하였다.

아이거 북벽 5등, 피츠바딜레 북동벽 단독등반등 알프스에서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의 낭가파르바트(8,126m)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1953년 7월 3일 새벽 2시, 캠프 5에서 폭풍으로 인해 원정대의 퇴각이 결정되었다. 거기에 반발한 불은 단독으로 정상공격을 감행, 7월 3일 오후 7시경 17시간의 사투 끝에 낭가파르바트 초등에 성공하였다. 정상 등정에 필요없는 모든 장비를 버리고 텐트, 침낭 하다못해 산소도 없이 단독으로 등정하였다. 이는 인류 최초의 8000m급 무산소 등정이기도 하다.

불은 등정에 성공하였지만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고 결국 하산 도중 해가 져버린다. 그러던 중 아이젠 한 쪽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결국 8000m에서 홀로 비박을 감행한다. 벼랑에 기대어 한 손으로 바위를 잡은 채로 비박.[3]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린 후 하산하여 출발한지 41시간 만에 캠프 5로 귀환하였다. 29세의 청년이었던 불은 마치 60대처럼 늙어버렸다. 원정대장이었던 헤를리히코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불을 괘씸하게 여겨 불의 동상을 치료하지 않았고 불은 결국 발가락 2개를 절단하고 만다.

4년 뒤인 1957년,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함께 브로드피크에 도전, 6월 9일 초등에 성공하였다. 그 뒤 초골리사 등정 후 하산 중 불은 예상치 못한 눈폭풍 속에 길을 잃었는데 거대한 커니스(눈으로 된 처마형 돌출물) 위를 디디게 되었고 그것이 붕괴되면서 눈사태와 함께 900미터 아래로 떨어져 실종, 사망하였다. 저서로 《8,000m의 위와 아래 Achttausend drüber und drunter》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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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로드피크, 다울라기리 초등자. 브로드피크는 헤르만 불과 함께 등정하였다.[2] 최초의 등반등급체계인 뵐첸바흐 체계의 가장 어려운 등급으로 YDS 체계의 5.9~5.10a에 해당한다. 현대에는 그리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지만 체계적인 등반 교육을 받아야 가능한 난이도인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정말 소수의 등반가만 가능한 난이도였다. 현대와 같은 암벽화나 하네스도 없었고 등반 초크는 더더욱 없었고 하켄 때려박아가며 등반하던 시절이다.한번 추락하면 30M씩 추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요새는 30m 추락하면 외국 같은 경우 뉴스에 뜬다;; [3] 로프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맨몸으로 벼랑에서 바위를 잡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