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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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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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
조선 조정
국왕 인조
반군
지휘관 이괄 · 비정통 국왕 흥안군

기익헌 · 한명련 · 이수백 · 이흥립 · 한윤 · 김효신 · 서아지 · 사쇄문 · 고효내



1. 개요
2. 생애
2.1. 황해도 출신의 천민, 용맹으로 이름을 남기다.
2.2. 도원수 권율, 부하장수 김응서가 한명련을 빼앗아가자 분노하다.
2.3. 선조의 관심과 총애를 받다.
2.4. 이몽학의 난 시기 김덕령의 대적자로 거론되다.
2.5. 이순신, 권율과 함께 조선의 양장으로 인정받다.
2.6. 왜란 이후 2품 오위장이 되다. 견제를 당하다.
2.7. 스스로 변방으로 떠나다. 파직과 유배 상소가 올라오다.
2.8. 광해군 집권기에 다시 기용되다.
2.9. 인조반정 이후 사직을 요청하나 거절당하다. 역모혐의로 내몰리다.
2.10. 임진왜란의 영웅, 반역자가 되다.
2.11. 같은 천민출신 장수 정충신에게 패하다.
2.12. 죽음
2.13. 병자호란 시기에 맹장으로 다시 언급되다.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韓明璉
(? ~ 1624년 2월 14일)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본관은 청주(淸州). 황해도 문화현[1] 출신. 천민 출신 의병으로서, 용맹함을 인정받아 승진했으며, 임진왜란 중 많은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싸웠다. 말년에는 억울한 역모에 휩쓸려 이괄의 난에 가담, 반역군의 핵심이 되어 반역에 앞장섰다. 정충신에게 패한 후 이괄과 함께 부하에게 배신당해 1624년 2월 14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경안면 경안리 경안역[2] 부근에서 참살당했다.

한윤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억울한 역모에 휘말려 복수를 위해서 청나라 편에 선 케이스


2. 생애[편집]



2.1. 황해도 출신의 천민, 용맹으로 이름을 남기다.[편집]



상이 이르기를,

"변장과 수령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12월 3일 기사中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장사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노숙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선거이홍계남ㆍ정희현ㆍ권응수ㆍ백사림ㆍ한명련도 다같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21일 기사中


금년 정월 28일 별장 한명련이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에 의하면 소수병력를 영솔하고 도로 가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병 1명을 생포하여 왔는데 통사가 조사한 결과 신은질이(信隱叱已)라는 자임을 알았다. [3]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中


한명련ㆍ김덕령은 모두 한 시대의 용장으로 남방에 헛되이 머물러 있으니, 그 휘하를 거느리고 혹은 군사를 모집하여 좌우 별장(左右別將)으로 칭하고 관서의 요긴한 곳에 둔수(屯守)하게 하다가 변을 듣고 달려가게 하면 족히 한 모퉁이를 감당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명성이 있으니 관서의 인심이 진정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0월 7일 기사中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별장 한명련이 충청도 방어사(박명현)와 합세해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공주ㆍ회덕 지경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왜적이 진산으로부터 산길을 경유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2일에 잠자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변을 기다렸는데 왜적의 선봉이 갑자기 이르러 서로 교전하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크게 쳐들어와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쏘아 죽인 것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중과부적인 데다가 날도 어두워져 다만 6급만 베어가지고 왔기에 그 귀를 베어 올려 보냅니다.

''이날 싸움에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좌우로 분격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창황한 나머지 전장에 버려두고 다 가져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힘껏 싸운 사람에 대해서는 권장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7일 기사中


경기 감사 홍이상이 치계하였다.

(중략)

별장 한명련이 소초평에서 싸워 참살한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13일 기사中


양호가 처음 내려올 적에 파죽의 형세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기쁨에 넘치어 노소 남녀가 얹고 지고 와서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적은 이에 앞서 청야를 하였기 때문에 30리 밖에서 나무와 마초를 가져오게 되니 인마가 기갈이 심한 데다 더구나 눈ㆍ비가 그치지 아니하여 의장이 얼고 젖으므로 밤에도 눈썹을 못 붙이고, 사망자가 많았다.

왜의 구원병이 수로와 육로로 함께 이르러 오므로 제장은 “잠시 물러가서 군사를 휴식시키고 다시 공격할 것을 계획하자.”고 청하자, 양호는, “내가 대군을 가지고서 조그만 성을 포위하여 이미 십여 일이 되었는데, 지금 좌차한다면 이는 황상을 저버린 것이라, 죽어도 후퇴할 수 없다.”고 했는데, 굳이 청하여 마침내 허락하고 돌아와 경주를 지켰다.

방수장ㆍ노득공ㆍ진우충ㆍ한명련 등이 적의 꾀에 빠져 포위되었으나 겨우 포위망을 헤치고 죽음을 면했으며, 남은 군사는 다 함몰당했다.

성호사설 제 25권 경사문 中



2.2. 도원수 권율, 부하장수 김응서가 한명련을 빼앗아가자 분노하다.[편집]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중략)

당초에 신이 한명련을 별장으로 삼은 것은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김덕령과 협동하여 여러 방면으로 사용하려고 계획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병사 김응서가 순찰사 서성의 말만을 신빙하여 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한명련을 강제로 자기 진영의 위장으로 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이 한명련으로 하여금 비변사가 서성의 장계 건에 대해 ‘우선 가덕의 임무를 수행하지 말고 그대로 별장의 일을 겸하라.’는 분부를 받고 행이한 관자를 보내어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응서가 한명련에게 회송한 통보에 이르기를 ‘비록 도원수의 별장이라 하더라도 일단 변방의 장수가 되었으면 병사의 명령을 묵살하고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잡사를 제쳐놓고 포수와 살수를 뽑아 거느리고 있다가 변을 당하면 대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명련으로 하여금 신의 절제를 받지 말고 전적으로 자기의 호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14일 기사 中



2.3. 선조의 관심과 총애를 받다.[편집]


한명련과 백사림 같은 자는 말단의 부하로 두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

조선왕조실록 1594년 6월 23일 기사 中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은 어떤 사람인가?”

전공으로 항오(졸병) 가운데에서 발탁되어 당상으로 승진하였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중략)..

다른 일은 알 수 없으나, 적중에 종횡무진 돌격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상관의 신분으로서 졸오(卒伍)와 같이 처신하여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혹 걸어다니기도 하였는데, 같은 당상관들이 비웃기라도 하면 의(義)로써 그들을 나무랐다고 하니, 이 일은 매우 가상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하지 못하던 일로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의 나이가 얼마인가?”

조선왕조실록 1596년 10월 21일 기사中


한명련에게 옷을 내려주라고 정원에 하교하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11월 24일 기사 中


상이 이르기를,

“한명련은 어디에 있는가? 칼날에 오른 팔을 부상당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중상은 아닌가?"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13일 기사 中


정원에 전교하였다.

“한명련은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용렬한 의사로 치료하게 할 수 없다. 급히 내의를 보내 병을 간호하되 마음을 써서 구제하도록 하라.”

명련은 힘껏 싸운 장사다. 앞장 서서 돌격하여 참획이 매우 많았으므로 상이 장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려 오른쪽 볼기에 탄알을 맞아 서울로 올라왔기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3일 기사 中


비변사가 아뢰기를,

“한명련이 집에 돌아가서 몸조리를 하기 위해 서소문 안의 인가에 이르렀는데 내일 출발한다고 하니 특별히 길에서 호송하게 할 것과 사용할 약물을 아울러 제급하게 할 것으로 본도 감사에게 하유하고 본사(本司)에서도 경유하는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한명련에게는 이미 침 놓는 의사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가지 않고 약물도 보내지 않았으니 지금 지방으로 내려가면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 우선 여기에 머무르게 하여 약물도 주고 며칠 후에 형편을 봐서 보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4일 기사 中


동부승지 이에게 전교하였다.

“한명련이 들어왔다 하기에 사람을 보내서 보니 거처하는 집이 바람도 가리지 못하고 급료도 공급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그 급료를 적지 않게 공급해야 한다. 쌀 5석과 빈 섬 수삼십(數三十)잎을 속히 제급해 주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5일 기사 中


장령 성이문이 와서 아뢰기를,

“적을 죽인 공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백성을 못살게 한 폐단이 극심하였다면[4]

, 그 공으로 그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동지(同知)[5] 한명련은 먼저 파직시키고 서둘러 전진으로 돌려보내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2일 기사 中



2.4. 이몽학의 난 시기 김덕령의 대적자로 거론되다.[편집]



“한명련이 지금 영남에 있는데, 또한 용감하옵니다. 그를 시켜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로서 항복한 왜병 50인을 이끌고 조력하게 한다면 김덕령이 어찌 감히 맞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자해필담



2.5. 이순신, 권율과 함께 조선의 양장으로 인정받다.[편집]



명나라 제독 마귀가 말하기를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ㆍ김응서ㆍ한명련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중략)..

지난번 아군의 대구와 삼가 전투에서는 한명련이 선전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5월 11일 기사中


제독(마귀)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 · 정기룡 · 한명련 · 권율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15일 기사 中



2.6. 왜란 이후 2품 오위장이 되다. 견제를 당하다.[편집]



궁궐을 숙위하는 벼슬은 결코 미천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위 장(五衛將) 한명련과 홍대방은 모두 하천한 사람들인데 지금 본직에 제수되었으므로 동렬의 관원들이 동료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중략)..

(선조의 답변)한명련 등은 어찌 오위 장이 되지 못하겠는가. 체직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2일 기사 中


사헌부가 아뢰기를,

“오위 장 한명련과 홍대방은 용렬하고 비루한 일개 천한 무리로서 숭반의 지위에 이르었으니, 이미 명기를 더럽혔다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5일 기사 中



2.7. 스스로 변방으로 떠나다. 파직과 유배 상소가 올라오다.[편집]



비변사가 아뢰기를,

“한명련이【해서의 천민이었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입신하여 전공으로 2품의 지위에 이르렀다.】북방의 사변을 목격하고 자신이 가겠다고 청하는 상소를 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용기가 매우 가상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20일 기사 中


사헌부가 아뢰기를,

“외람되이 역말을 사용한 죄에 대한 율이 지극히 엄하니 드러나는 대로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황해도 기린역에서 3월에 역말을 사용한 것에 관한 성책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니, 행 사과 한명련은 당초 역말을 타라고 한 명이 없었는데도 원산ㆍ연양 두 역의 기복마(騎卜馬) 각각 1필씩을 공공연하게 외람되이 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4년 5월 15일 기사 中


(선조가)비망기를 내렸다.[6]

한명련은 장사로서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적을 수없이 베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을 힘을 다해 국가에 보답했는데 이번에 차질이 생겨 유방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그 사이에 깊은 실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이 없어 잘못하여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장차 죽게 된 어미를 버려두고 멀리 부산(釜山)으로 유배간다면 모자가 각각 한쪽 하늘가에 있게 되어 오직 꿈속에서나 오갈 뿐일 것인데 나는 그에게 차마 그러한 처지가 되게 하지 못하겠다.

조선왕조실록 1604년 6월 2일 기사 中



2.8. 광해군 집권기에 다시 기용되다.[편집]



비록 상중에 있는 자라 하더라도 한명련 등과 같은 드러난 역전의 장사는 기복시켜 올라오게 하고,

조선왕조실록 1609년 3월 3일 기사 中


한명련을 길주 목사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 1615년 4월 17일 기사 中


회령부사가,‘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나라 군의 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습니다.

[7]

책중일록 1619년 3월 8일 기사 중 中


의주 유학 주의립이 상소하기를

(중략)

순변사 한명련은 군졸들을 잘 보살피고 부윤과 함께 한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죽음으로 지킬 것을 기약하였으니 모두 논상하기를 청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622년 6월 12일 기사 中



2.9. 인조반정 이후 사직을 요청하나 거절당하다. 역모혐의로 내몰리다.[편집]



순변사 한명련이 소장을 올려 면직을 비니, 답하였다.

“내가 요사이 서쪽 변방에 대한 걱정이 늦추어진 것은 오직 경이 변방에 있기 때문이다. 노병으로 사피하지 말고 다시 면려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조선왕조실록 1623년 10월 26일 기사 中


*이우가 공초하기를

..(중략)..

드디어 그 정상을 실토하기를 ‘이괄ㆍ한명련ㆍ정충신ㆍ이익 등이 지금 연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중략)..

이때부터 불궤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의 세 부자와 정충신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은 정돈ㆍ정찬과 함께 유산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조선왕조실록 1624년 1월 17일 기사 中



2.10. 임진왜란의 영웅, 반역자가 되다.[편집]



역신 이괄과 역신 한명련은 당초 그 아들이 반역을 꾀한 것이 드러났기에 사신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더니, 역신들이 감히 사신을 죽이는 등 명령에 항거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0일 기사 中


이괄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국가를 경시하여 불궤를 음모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잡히게 되자 자기 휘하를 협박하고 한명련과 연합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두 역적은 모두 용병(用兵)을 잘하여 ..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1일 기사 中



2.11. 같은 천민출신 장수 정충신에게 패하다.[편집]



원수 장만이 처음에 둘러싸고 지켜서 적을 지치게 하려 하였는데, 정충신이 말하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곧바로 안현에 올라가 적과 싸우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병법에 이른바 먼저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는 것이다.’ 하니 남이흥이 그 계책을 찬성하였다. 이에 정충신 등이 밤을 틈타 안현에 진을 쳤다. 적은 이미 거침없이 진격하여 대궐을 침범하였으므로 대적이 없다고 스스로 믿고 싸우지 않아도 패주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이튿날 아침에 무리를 전부 출동시켜 성을 나와 길을 나누어 전진하였는데 험한 곳을 우러러보고 공격하므로 포탄과 화살이 적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제장들은 또한 적을 성에 들어오게 한 죄를 스스로 알고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웠는데 이미 지세가 험한 데를 얻은 데다가 하늘이 또 도와서 교전하는 처음에 풍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관군이 승세를 타게 되자 사기가 절로 배나 되었다. 적이 드디어 크게 패해서 달아났는데, 적병 4백여 급을 베고 3백여 인을 사로잡았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1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김경운은 역전하다가 죽었으니, 매우 애석하다. 그날 한참 동안 접전하였으나 관군은 죽은 자가 전혀 없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지형이 좋은 곳에 진을 쳤으므로 적의 포탄과 화살이 미치지 못하거나 넘어가 버려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김경운이 탄환에 맞고 나서는 군사들의 마음이 잠시 꺾이는 듯하였는데, 한명련을 닮은 적의 좌영장(左營將) 이양이란 자가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죽자 모든 군사들이 한명련이 죽었다고 여겨 환호하면서 사기가 한없이 치솟았습니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3월 3일 기사 中



2.12. 죽음[편집]



대장 신경진의 군관이 와서 이괄ㆍ한명련 두 역적이 죽은 정상을 아뢰었다. 상이 불러서 그 정상을 물으니 군관이 대답하기를,“적이 12일에 40여 기를 거느리고 광주에서 이천으로 향하여 경안역 근처에서 머물러 묵었는데 그의 수하 사람에게 참살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4일 기사 中


적장 이수백ㆍ기익헌 등이 이괄ㆍ한명련 등을 베어가지고 행조에 와서 바쳤다.

조선왕조실록 1624년 2월 15일 기사 中



2.13. 병자호란 시기에 맹장으로 다시 언급되다.[편집]



이경증이 아뢰기를,

“그들 역시 어찌 성심을 다하여 일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창졸간에 일어난 사태에 무기가 구비되지 않으니, 심신이 놀라고 산란하여 일을 주선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적이 강하고 사납지만 왜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고언백이나 한명련 같은 자가 있다면 적진을 돌파하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담당할 사람을 한 사람도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8]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1636) 12월 19일



3.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칼부림_한명련.jpg
  • 네이버 웹툰칼부림》2부가 이괄의 난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주조연급으로 등장한다. 이괄과 같이 모함에 연루되었지만 탈출하고 이괄군과 합류한다.[9] 마탄 전투 등등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지만 결국 대세가 기울자 이수백의 배신으로 자다가 기습당해 죽는다. 주로 이괄이 휘하 장수들을 다그치거나 장수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면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특이사항으로 이괄군 내에서 유일하게 이괄의 분노에 찬 일갈을 받은 적이 없다.[10]

  • 금수친구들에선 진짜 한명련이랑 동명이인 한명련이 등장한다. 진짜 한명련이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신이 고향에 돌아가는데 방해가 될까봐 공적을 전부 동명이인 한명련에게 모조리 넘겼다고 한다. 그 이후 동명이인 한명련은 실제 역사대로 이괄의 난에 가담해서 죽고 진짜 한명련은 이름을 한명륜으로 개명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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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천군[2]경기도 광주시 역동[3] 이후 신은질이는 상당한 정보를 토해냈는데, 장교급의 인물이 아니였나 추측해볼 여지가 있다[4] 정확히 어떤 폐단을 저질렀는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다. 다만 이후에 오위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한명련의 미천했던 신분만을 트집 잡았을 뿐 이 때의 폐단을 거론하지 않았다. 혹은 이 때 이미 종이품 관직이었던 한명련에 대한 정치적 견제였을 가능성도 있다.[5] 조선시대 돈녕부 ‧ 중추부 ‧ 의금부 ‧ 경연청 ‧ 성균관 ‧ 춘추관 ‧ 삼군부 ‧ 훈련원 등에 속한 종이품 관직이다.[6] 왕의 명령이나 의견이 담긴 문서를 말한다.[7] 이 유시를 들은 인물은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 였고, 외교문서인 이문등록에 의하면 해당 회령부사는 한명련이다.즉 한명련은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누르하치의 차관에게 조선군의 사정을 설명한 것[8] 역모로 죽은 장수를 임금 앞에서 언급한 것은 대놓고 네가 잘못해서 죽여놓고 이 사단을 만든 거 아니냐고 대놓고 직언을 한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한명련 일가는 역적으로 몰리자 이괄에 가담 패주 후 후금으로 망명해서 길잡이를 했다.[9] 가장 알려진 설은 한명련도 금부도사에게 압송되던 중 이괄이 구했으나, 다른 설로는 한명련이 주도적으로 금부도사를 죽이고 이괄에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다. 칼부림에서는 두 기사를 인용하면서 후자를 택했다고 밝혔다.[10] 애초에 이괄이나 한명련이나 서로 상호존대를 하며 뜻을 함께 했으며 시간이 지나 이괄이 불리해지자 아들인 한윤이 이괄과 떨어질 것을 권고하자 반대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