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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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瑤

생몰년도 미상

고구려의 인물.

본래는 후한의 유주 사람으로 217년 8월에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해 산상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책성에 안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평주 사람으로 기록되었는데, 평주는 서진 시기에 만들어진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위나라에서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등 다섯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고 다시 합해 유주로 삼았다가 276년 10월에 이전의 다섯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고 한다.

당나라 시기에 저술된 통전에서는 평주는 노룡을 중심으로 한 요서에 있다고 적었으며, 청나라 초기의 독사방여기요에는 238년에 위나라에서 유주를 둘로 분할해 유주 동쪽에 평주를 신설했다고 한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평주목이라 자칭한 것에 근거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병도의 국역 삼국사기에서는 평주는 유주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여호규의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고구려의 대외 정책에서 후한의 붕괴나 동연의 흥기가 고구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국천왕 말년에 한인 투항자가 많고 산상왕 대에 하요가 투항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하요의 투항과 고국천왕 말년의 한인 투항에 대해 이를 보아 중국 대륙의 난을 피해 고구려까지 유망한 자가 상당수 존재했다고 추정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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