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프로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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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피에르 프로티에
Pierre Frotier
생몰년도
미상 ~ 1459년
출생지
프랑스 왕국 멜제아르
사망지
프랑스 왕국 멜제아르 프로티에 요새
아버지
장 프로티에
어머니
잔 클레레
형제
콜린 프로티에
아내
마르그리트 드 쁘회이
자녀
프레제트 프로티에
직위
쁘회이 영주, 도팽 근위대 사령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샤를 7세의 호위를 맡았다.


2. 생애[편집]


멜제아르 영주인 장 프로티에와 생줄리앙 라르의 영주인 장 클레레 다르디외의 딸이자 퐁테닐의 여성 영주인 잔 클레레의 장남이다. 형제로 콜린 프로티에가 있었다. 아버지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의 기사였으며, 1407년 루이 1세 도를레앙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자 아르마냑파에 가담해 부르고뉴파에 대적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아르마냑파의 편에 섰으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 의해 기병대 장교에 발탁되었다.

1418년 5월 28일 밤, 용맹공 장이 파견한 부르고뉴군이 어둠을 틈타 파리를 급습했다. 그들은 파리 내부의 내통자들이 성문을 열어준 틈을 타 시내로 들어가 수많은 아르마냑파 인사들을 학살했고, 파리 왕가가 거주하는 호텔 생폴로 쳐들어갔다. 이때 파리 총독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당시 15살이었던 도팽 샤를을 업고 탈출했고, 그와 장 루베가 타네기를 도왔다. 그들은 라 바스티유와 멜룬을 거쳐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이후 장 프로티에는 200명 가량의 근위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도팽 샤를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19년, 용맹공 장은 도팽 샤를에게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도팽 샤를은 장 루베, 피에르 프로티에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라곤의 욜랑드 등의 권유에 따라 그와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7월 11일, 푸이르포르에서 양자간의 첫번째 평화협상이 열렸다. 용맹공 장과 도팽의 고문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제안한 평화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고, 용맹공 장을 정식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프로티에는 준수 서약이 적힌 양피지에 서명하고 자기 도장을 찍었다.

두번째 회담은 1419년 9월 10일 몬테로 다리에서 열렸다. 이때 도팽 샤를은 용맹공 장이 잉글랜드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고 비난했고, 용맹공 장이 이를 반박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때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기욤 2세 드 나르본을 비롯한 여러 기사가 용맹공 장을 기습 공격해 처단했다. 이때 그는 도팽 샤를을 호위하기만 헀을 뿐 암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부르고뉴파는 그 역시 암살 계획을 알고도 방조했을 거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1420년 5월 20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을 맡으며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사이의 아들이 그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1422년 8월 3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그의 갓난아들 헨리 6세가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잉글램드 겸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도팽 샤를은 이에 대응해 1422년 10월 30일 부르주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했고, 피에르 프로티에는 왕의 근위대장으로서 샤를 7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424년 3월 20일, 샤를 7세는 피에르 프로티에를 푸아투의 세네샬로 선임했다.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서 샤를 7세를 지지하는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 연합군이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다. 도팽 샤를은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에 대적하려면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1424년 11월 30일 마콩에서 양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얻고 싶다면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장기간의 협상 끝에, 장 5세의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타협이 이뤄졌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도팽 샤를이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1425년 4월, 리슈몽은 앙주 공작부인 욜랑드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도팽 샤를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그해 6월 초, 리슈몽과 욜랑드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도팽 샤를의 군대와 대치했다. 도팽 샤를은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 피에르 프로티에 등을 해임했다. 그 후 프로티에는 멜제아르에 은신했다.

1435년 9월 21일,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 7세와 화해하고 공동으로 잉글랜드에 대항한다는 내용의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조약 조항 중에는 1419년 몬테로 다리에서 용맹공 장을 죽인 샤를 7세의 전 고문들을 체포해 신체와 재산에 대한 처벌을 내리고 그들을 용서없이 추방하는 내용이 있었다. 부르고뉴 측 연대기 작가 올리비에 드 라마르슈는 이 '전 고문' 중에 피에르 프로티에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이 조항을 따르지 않고 피에르 프로티에를 비롯한 옛 고문들에 대한 우정을 유지했다.

1444년 19년 만에 샤를 7세의 부름을 받고 궁정에 복귀해 왕의 고문이자 시종이 되었다. 1450년 샤를 7세와 정부 아녜스 소렐의 딸인 잔 드 발루아의 개인 교육을 맡았다. 1449년 샤를 7세가 단행한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햇고, 1449년 11월 10일 샤를 7세의 루앙 입성식에서 600명의 궁수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맨 처음에 도시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1456년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이 샤를 7세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샤를 7세는 피에르 프로티에를 알랑송으로 보내 그곳의 총독으로서 다스리게 했다. 1459년 4월 4일 낭트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협상해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59년 멜제아르 프로티에 요새에서 사망했고, 쁘회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쁘회이 남작 질의 딸인 마르그리트 드 쁘회이와 결혼해 아들 프레제트 프로티에를 낳았다. 프레제트는 몽바스 자작, 아제르페롱 영주를 역임했으나, 1497년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한편 남동생 콜린 프로티에는 라 메셀리에르 영지의 상속녀인 이자보 잔느 뒤소와 결혼했다. 콜린과 이자보의 후손은 오늘날까지 프로티에 가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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