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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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판니움의 프리스쿠스
(라틴어: Priscus of Panium, 그리스어: Πρίσκος)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로마 제국의 외교관, 역사가, 수사학자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5세기 로마 제국의 외교관, 역사가, 수사학자.


2. 행적[편집]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말라라스와 참회자 테오파네스는 그를 "트라키아인"이라고 지칭했다. 이로 볼 때, 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판니움은 트라키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헤라클레아 시의 마르마라해 북쪽 해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판니오스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아후 테오도시우스 2세 치하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던 막시미누스의 비서를 맡던 그는 448년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발칸 반도로 쳐들어와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던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하는 사절단 일원으로 갔다. 그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사절단의 목적은 훈족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공물을 지불하며, 훈족의 치하에 있다가 로마 제국으로 탈출한 이들을 도로 훈족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당시 프리스쿠스는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아틸라의 심복인 에디카를 매수한 뒤 암살자 비길라스를 사절단에 포함시킨 후 아틸라를 죽이게 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틸라 암살 작전은 에디카가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틸라에게 고백하면서 들통났지만, 아틸라는 의외로 사절단을 해치지 않고 돌려보냈다.

프리스쿠스는 훗날 저서 <비잔티움의 역사(Ἱστορία Βυζαντιακή)>에서 아틸라와 접견했던 일을 상세히 밝혔다. 그는 훈족의 계층 구조, 정복한 부족과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훈족과 로마 사회를 비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훈족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부족들로부터 "늑대처럼" 공물을 뜯어내며, 말 사육에 필요한 초원을 확보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정기적으로 시장을 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상인들과 적극적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훈족 스타일의 옷을 입은 그리스 상인과 나눈 대화도 밝혔다. 이 상인은 8년 전(441~442년) 훈족에 의해 비미나치움이 약탈당했을 때 포로가 된 후 훈족 귀족 오네게시오스의 노예가 되었다가 자유를 얻은 뒤 여기에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고 한다. 프리스쿠스의 증언에 따르면, 이 그리스 상인은 제국의 빈약한 방어, 부담스러운 세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재판장의 불의스러운 행태 등 로마 제국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프리스쿠스는 훈족의 왕 아틸라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틸라의 용모는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지만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아틸라와 대면한 후 귀환한 프리스쿠스는 450년경 로마에서 프랑크족 왕의 차남이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양자로 입적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크족 왕의 장남은 아틸라 편에 섰고, 차남은 로마 편에 섰다고 한다. 452년 막시미누스와 함께 아랍 및 누비아 유목 부족과 제국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임무를 맡아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고트족 출신의 사령관 아르다부르와 아랍인 사절 사이의 평화 협상을 지켜봤다. 이후 막시무스와 함께 이집트로 향한 그는 트레발드 시에서 최근에 제국에 정복된 누비아인과 블레미아인 부족과의 평화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그러나 453년 막시미누스가 병에 걸려 사망하자, 유목민들은 합의를 위반하고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프리스쿠스는 막시미누스 사후 알렉산드리아에 체류하면서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파의 격렬한 투쟁을 목격했다. 이후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최측근인 에우페미우스의 비서가 되어 동방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 <수다(Suda)>에 따르면, 프리스쿠스는 <비잔티움의 역사(Ἱστορία Βυζαντιακή)> 8권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조시무스, 에바그리우스 스콜라스티코스, 카시오도로스, 요르다네스 등 후대의 여러 역사가들의 저서에 인용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행정에 관하여>에서 프리스쿠스가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아틸라를 찾아갔을 때 겪었던 일들을 기술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고, 현대 학자들이 훈족과 아틸라를 연구할 때 주요 사료로 참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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