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바 민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알라웅파야
나웅다우기
신뷰신
싱구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파웅카
보도파야
바기도
타라와디
제9대
제10대
제11대

파간
민돈
티바 민





티바 민
သီပေါ‌မင်း | Thibaw Min


출생
1859년 1월 1일
꼰바웅 왕조 만달레이
(現 미얀마 만달레이주 만달레이)
사망
1916년 12월 19일 (향년 57세)
인도 제국 봄베이주 라트나기리
(現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라트나기리)
왕조
꼰바웅 왕조
전임자
민돈
후임자
없음 (왕조의 멸망)
재위
1878년 ~ 1885년
종교
상좌부 불교
서명
파일:Thibaw_Min_Signature.svg.png

1. 개요
2. 생애
3. 폐위
4. 후일담



1. 개요[편집]


미얀마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미얀마 최후의 왕. 티바 민을 끝으로 미얀마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대신 영국령 버마가 들어선다.


2. 생애[편집]


티바 민은 민돈 왕과 왕비들 중 하나인 랑쉐 미바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아명은 마웅야이셋(မောင်ရေစက်)이었다. 그러나 민돈 왕은 티바 민이 태어난 이후 랑쉐 비마야 왕비를 불교 사찰로 추방해버렸고, 랑쉐 왕비는 사찰에서 비구니로 살다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다만 티바 왕자는 아버지의 비호 아래 사찰에서 불경들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불경 해석시험을 통과하면서 왕과 제1 왕비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민돈 왕을 모시는 재상들 중 하나였던 신뷰마신이 자신의 딸 수피얄랏과 티바 왕자를 중매를 서 결혼시켰고, 티바 왕자는 신뷰마신의 힘을 뒷배경으로 삼아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급부상한다.

신뷰마신은 민돈 왕 재위기 말년에 급속도로 세를 불렸다. 신뷰마신은 자신의 사위였던 티바 민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당시 티바 왕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어린 왕족들을 싸그리 살해해버리는 등 가혹한 대숙청을 펼치며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결국 신뷰마신의 숙청 덕에 티바 왕자는 1878년에 미얀마의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바 민이 즉위했을 당시 미얀마는 이미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미얀마 남부 절반은 영국이 강제로 빼앗아 무려 30년 가까이 사실상 식민통치하고 있던 실정이었고, 왕권은 제대로 서지 않아 왕가의 권위는 날로 쇠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티바 민은 당연히 영국으로부터 이 영토를 돌려받고 싶어했다. 티바 왕은 영국의 최대 경쟁자라고 할 수 있었던 프랑스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미 태국을 중간영토로 삼고 베트남을 삼키는 것에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영국과 합의가 이루어진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미얀마의 독립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티바 왕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영국의 간섭은 더더욱 심해지게 된다.[1]

티바 왕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해보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려 노력했다. 당시 국고가 바닥나자 세금을 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1878년에 국가가 주최하는 국영 복권을 도입하면서 돈을 끌어모으려 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복권 제도는 잠깐동안만 인기를 끌다가 불공정한 추첨 제도와 부정부패 등으로 금방 열기가 식었고,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느라 전재산을 탕진해버리는 폐혜를 낳기도 했다. 결국 야심차게 추진한 복권 사업은 1880년에 완전히 접고야 만다. 그 외에도 티바 왕은 부서를 14개로 확대개편하고 영국령 인도의 행정제도를 본따 미얀마를 개혁하려 시도했다.


3. 폐위[편집]


1885년 티바 왕이 궁전에서 영국이 장악한 미얀마 남부 지방을 해방하겠다는 발언을 하자 영국은 이를 꼬투리잡아 마침내 미얀마를 끝장내기로 결심한다. 티바 왕을 국제간 조약을 무시하는 폭군으로 몰아가면서 미얀마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영국은 해리 프렌더가스트 장군이 이끄는 11,000명의 원정대를 몰아 미얀마를 침공했다. 영국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로 그대로 만달레이의 왕궁까지 쳐들어갔다. 영국은 전쟁을 선포한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왕궁에서 티바 왕과 왕족들 대부분을 사로잡았고, 곧바로 강제로 퇴위당한 뒤 이라와띠 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증기선에 올라타 인도로 끌려갔다.[2]

영국은 폐위된 티바 왕, 수피얄랏 왕비, 그리고 2명의 딸들을 인도 제국의 라트나기리 지방[3]으로 끌고갔다. 티바 왕은 무려 24년을 가까이 이 라트나기리에서 얹혀살았다. 그러나 1906년에 영국 식민정부가 티바 왕을 위해 125,000루피를 들여 새로운 궁궐을 지어주었고, 왕은 라테라이트와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궁전에서 꽤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인도 정부는 티바 왕에게 매년 35,000 루피에서 42,000 루피 사이의 연금을 주었다. 궁전을 지어주었던 1906년부터는 이 연금이 10만 루피로 크게 올라갔다. 왕은 라트나기리에서 살면서 웬만하면 궁궐을 떠나지 않으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가끔씩 지역에서 여는 디왈리 축제에 기부금을 보내는 게 전부였고, 이를 제외하면 대외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왕은 1916년 12월 15일에 눈을 감았고, 인근의 기독교 공동묘지에 묻혔다.[4]

4. 후일담[편집]


왕과 함께 추방생활을 하던 나머지 왕족들은 왕이 죽은 후 1919년에 미얀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티바 왕의 첫째 딸이었던 '미야트 파야 기' 공주는 인도에서 추방생활을 하던 중 눈이 맞은 인도인 운전사 고팔 사완트 때문에 결국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5] 공주는 사랑을 쟁취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인도에서 굉장히 빈곤한 삶을 살았다. 고팔 사완트가 공주가 받은 연금들 대부분을 탕진해버린 것이다. 미야트 공주와 고팔 사완트는 사이에서 투투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투투는 자라서 11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남겼고, 이들의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미얀마 왕족의 후예라는 자각도 없이 인도에서 하류층으로 살고 있었다고.

둘째 딸인 미야트 파야 랏 공주는 작위 요구자가 되어 아버지의 비밀 비서였던 킨 마웅 랏과 결혼했다. 그들은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으나 시종의 아이를 입양했다고 전해진다. 세번째 딸인 미야트 파야 공주는 2번 결혼했다. 첫 상대는 미얀마 왕자였고, 두번째 상대는 변호사였다고. 네번째 딸인 미야트 파야 갈라이 공주는 예전에 승려였던 남자와 결혼했다. 이들은 6명의 아이들을 낳았고, 이들 중 하나가 왕위요구자라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05:13:58에 나무위키 티바 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영국과 미얀마 사이의 관계는 '신발 사건' 때문에 최악으로 치닫는다. 영국 외교관들이 만달레이 왕궁에 신발을 벗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오려 하자 미얀마인들은 격분했고, 결국 외교관들은 쫒겨났다. 안그래도 위태위태했던 영국과 미얀마 사이의 관계는 이 사건 이후로 완전히 끝장났다.[2]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이라와띠 강변에 몰려 티바 왕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3] 아라비아 해 인근의 항구도시[4] 라트나기리까지 그를 따라왔던 파야 갈라이 재상도 함께 묻혔다.[5] 물론 나머지 왕족들은 극렬히 반대했지만 공주는 끝까지 완고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