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꽃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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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의 전개
2.1. 범행 과정
2.2. 너무 수상한 남편 카미야
2.3. 드러나는 진실
2.4. 아무도 몰랐던 사건의 진상
2.5. 재판
3. 진상을 밝혀낸 법의학자 오노 요키치
4. 기타


1. 개요[편집]


トリカブト保険金殺人事件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1986년일본에서 카미야 치카라(神谷力)가 보험금 1억 8,500만 엔을 노리고 아내를 투구꽃복어의 독으로 독살한 사건.

사건 당시에는 경찰도 몇 년 동안 감을 못 잡을 정도로 철저한 지능 과학 범죄였지만 32세였던 오노 요키치(大野曜吉) 교수가 미제사건이 될 뻔했던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


2. 사건의 전개[편집]



2.1. 범행 과정[편집]


범인인 카미야 치카라(당시 46세)는 술집 종업원이었던 13세 연하인 아내를 만나 자신을 공인회계사라고 소개하였으며 모피 코트와 400만 엔짜리 반지를 선물하면서 아내에게 접근했다.

카미야는 만난 지 6일 만에 청혼했지만 아내의 친구들은 카미야를 의심하여 카미야 치카라가 자기소개와 달리 공인회계사가 아님을 알아냈다. 거짓말을 들킨 카미야는 아내의 친구들에게 추궁받자 자기는 경영 컨설턴트로 중소기업의 회계 관리를 한다고 답변하며 의심을 피하려고 했지만 아내의 친구들은 카미야가 당시 신고 있던 낡고 해진 구두를 보고 고가의 선물을 주었던 행동과 어울리지 않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아내는 술집을 그만두고 오사카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던 1986년 5월 20일 범인 카미야는 아내와 아내 친구들과 함께 오키나와에서 여행 중이었으나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오전 9시 30분에 호텔에서 조식을 먹은 뒤 10시 30분 체크아웃을 했으며 오전 11시 자신은 나하공항에 도착해 오키나와를 떠나고 아내는 오전 11시 40분 카미야와 헤어진 뒤 친구 3명과 함께 이시가키섬에 놀러갔다.

12시 53분 친구들과 이시카키섬에 도착한 아내는 택시를 탄 후 이상하게 땀을 엄청나게 흘리기 시작했다. 증상은 점점 심각해져서 오후 1시 27분에 호텔에서 체크인한 뒤 방에 들어가 구토를 호소하며 경련을 일으켰고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조치를 받았으나 결국 오후 3시 4분에 숨을 거두었다.


2.2. 너무 수상한 남편 카미야[편집]


카미야를 계속 의심했던 아내의 친구들은 형사를 통해 부검을 의뢰하였다. 부검은 류큐대학 오노 요키치 교수가 집도하였는데 심장에서 작은 울혈이 발견되었으나 다른 장기들은 비교적 깨끗했다. 사망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자 오노 교수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으며 남편 카미야를 만난 날에 그가 아내가 급사한 사람치고는 너무 침착하게 행동하고 자신에게 '장기는 모두 제자리에 갖다 놓았느냐?'는 알 수 없는 질문을 하자 의심이 더욱 짙어져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장과 혈액을 보존해 두었다.

경찰도 수사를 지속하고 이런저런 검사도 해 봤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도 복용한 지 거의 3시간 후에 효과가 나오는 독극물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으며 이 와중에 아내가 생전에 자주 먹었던 약 때문에 아내의 친구들은 카미야를 더욱 의심했다. 카미야와 결혼한 후부터 아내가 지속적으로 복용한 그가 직접 제조한 영양제를 의심한 것이다. 카미야는 친구들에게 캡슐의 사용 내역을 말한 뒤 '아내를 수령인으로 하여 약 2억 엔짜리 보험을 들었다.'고 하였다. 친구들은 의심을 견딜 수 없어 경찰, 신문사에 전화하여 조사를 의뢰하였지만 제대로 조사해 주는 곳은 거의 없었는데 일간스포츠의 오다기리 기자와 FOCUS 편집부 기자였던 츠지야 마모루 기자가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취재 전쟁이 시작되고 류큐대학을 츠지야 기자가 방문했다. 그에 따르면 1965년 카미야는 간호사인 첫 번째 부인과 만나 결혼한 채로 7년 뒤 직장 상사인 두 번째 부인을 만나 회사를 옮겨 경리부부장이 되었고 이중생활 10년 뒤 첫 번째 아내는 가슴의 통증 및 구토를 호소하다가 결국 1981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나 남편이 받을 보험금은 없었다고 하며 2번째 부인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며칠 뒤 오다기리 기자도 오노 교수를 방문했는데 오다기리에 따르면 카미야가 1985년에 약국에서 캡슐형 강장제[1]를 다량 구매하면서 아버지가 노망이 들어 의사인 양 주민들에게 나눠 준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하지만 자기가 조사해 보니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카미야와 같이 살지도 않았고 노망이 나지도 않았다.

한편 아내의 친구들은 보험회사에 닥치는 대로 전화해 보험 이력 조사를 의뢰했고 이에 보험회사 4곳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렇게 밝혀진 보험금은 무려 1억 8500만 엔[2]으로, 매달 붓는 보험금이 36만 엔에 달했다고 한다. 두 기자는 신문 1면에 이 내용을 대문짝만하게 실었고 오노 교수는 자신이 모은 자료를 경찰에게 넘겼으며 사망진단서의 사인을 심근경색에서 급성 신부전으로 고쳤다. 여기서 갑자기 사인을 고친 이유는 후술한다.

경찰은 비밀리에 수사 회의를 열어 카미야가 아내를 어떻게 죽였는지 조사하였지만 조사를 의뢰받은 치바대학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는데 그 어떤 독극물을 넣고 캡슐을 30겹씩이나 싸도 3시간 후에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캡슐이 위산을 버티지 못해 전부 그보다 빠른 시간에 캡슐이 녹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험회사가 사건이 의심쩍다는 이유로 카미야에게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카미야는 자기가 쓴 수기문을 기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반론하였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자 점점 언론의 보도는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카미야는 보험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었고 다시 취직하여 경리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2.3. 드러나는 진실[편집]


하지만 오노 교수는 포기하지 않고 전문가들과 계속 사인을 조사하였다. 한동안 수확이 없었으나 우연히 오노 교수가 본 영문 백과사전에서 아내가 보인 증상과 투구꽃의 독[3]인 '아코니틴'을 섭취했을 때의 증상이 일치함을 알아냈다. 여기서 오노 교수는 마지막 가능성을 보고 당시로서는 최신기기인 초미량 분석기가 있는 도호쿠대학의 미즈가키 교수에게 검사를 의뢰하고 아코니틴을 검출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무려 의뢰로부터 9개월 뒤에 아내의 혈액에서 아코니틴이 검출되었다. 1990년 10월에 열린 보험금 민사소송 중에 오노 교수가 아코니틴을 검출했다고 증언하면서 사건은 다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카미야는 이 시절 유흥에 빠져 애인 3명을 사귀었으며 애인들에게 차와 맨션을 선물하는 등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경찰은 투구꽃의 출처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였고 결국 한 원예용품점에서 카미야가 투구꽃 화분을 무려 69그루나 구매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카미야가 따로 월셋방을 빌렸는데 그 방의 전기세와 수도세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왔다는 사실도 밝혀냈고 그 아파트의 다다미를 검사해서 미량이지만 아코니틴도 찾아냈지만 아직도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코니틴은 1그램만 섭취해도 약 30분만에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데 아내는 카미야와 헤어진 후 3시간이나 지나서 사망했기 때문에 아무리 수사를 해도 그 시간 간격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카미야의 주변조사만 계속하던 경찰은 그가 경리부장이라는 자리를 악용하여 7억 엔에 달하는 회사 주식을 멋대로 팔아넘긴 사실을 밝혀내 그를 긴급 체포하여 횡령죄로 기소하였고 얼마 후 살인 및 사기미수죄로 또다시 기소하였지만 아직도 3시간 공백을 채우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카미야는 직접 방송에 나와 이 공백을 근거로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할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꼬리도 길면 잡히는 법이다. 한 어민이 카미야가 복어를 다량으로 구매했음을 제보하였다. 처음에는 복어독을 사용했다고 예상하고 수사했으나 상술했듯이 테트로도톡신을 사용해도 3시간 후에나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2.4. 아무도 몰랐던 사건의 진상[편집]


테트로도톡신과 아코니틴이 인체에 흡수되면 서로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둘 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맹독인데 두 독을 같이 먹으면 서로의 효과를 상쇄하여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상술한 월셋방에서 카미야는 실험을 반복하여 아내에게 줄 독약을 제조하고 실험용 생쥐와 전문가나 소지하는 기계를 구입하며 몇 년 동안 범행을 계획하였다. 학자였다면 평생의 명예가 될 수도 있었을 세계적인 발견을 살인을 위해 몰래 사용하고 있었으니 경찰과 대학이 아무리 범행 방법을 조사해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토대로 경찰은 카미야를 기소했다.

2.5. 재판[편집]


첫 번째, 두 번째 부인의 사망사건은 기소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증거를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부인의 독살 혐의로 카미야는 1,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02년에는 한국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았으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12년 11월 17일에 암으로 인해 의료형무소에서 73세로 사망했다.


3. 진상을 밝혀낸 법의학자 오노 요키치[편집]


우연히도 법의학자 오노 요키치는 처음부터 사건이 수상하다고 느끼고 아내의 혈액과 심장 표본을 보존하여 사건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는데 첫 부검 때는 아내의 사인이 심근경색이라고 했으나 후에 급성 신부전으로 변경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전북대 의전원 법의학과 이호 교수는 "심근경색이면 동맥경화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젊은 여성들은 에스트로겐의 역할로 인해 심근경색이 매우 드물다. 심근경색으로 죽긴 했으나 이유는 알 수 없고, 혹시나 나중에 기술이 발전하면 사망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샘플을 보관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4. 기타[편집]


마스터 키튼에서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딴 것으로 보이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떤 대기업의 몇몇 임원들이 몇 년간 돌연사했는데 알고 보니 아코니틴에서 추출된 아트로핀 때문이었다는 내용이었으며 이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중간에 키튼 본인이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골든 카무이에서는 독극물로 사람의 운을 시험한다는 살인마 세키야 와치로에 의해서 히지카타 토시조와 카도쿠라 토시유키가 한쪽 독에 중독되었으나 히지카타는 젊을 때의 지식으로, 카도쿠라는 고통 때문에 빨리 죽으려고, 반대쪽 독을 복용해서 살아났다고 묘사된다. 하지만 본문의 사건과 투구꽃 항목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의 작용을 늦춰서 시간을 버는 정도만 가능하고 그것도 용량과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기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만화적 허용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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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캡슐에 약을 넣어서 마시는 제품이었다.[2] 1986년 기준으로 100엔이 한화 538.4원이었다. 따라서 1억 8500만 엔을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한화 9억 9600만 원 남짓, 2020년 기준 한국 물가로는 30억 원어치에 해당한다.[3] 주로 뿌리 부분에서 많이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