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모두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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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가
2. 다른 폭군들과의 비교
2.1. 칼리굴라, 네로와의 비교
2.2. 칼리굴라의 악선전 관련
2.3. 칼리굴라의 통치 방향
2.4. 칼리굴라의 치적
2.5. 네로 관련
2.6. 네로와 콤모두스의 사치
2.7. 반농담 재평가
2.8. 제국 방치
2.9. 총론
2.10. 기타
2.11. 부자세습제의 폐해?



1. 평가[편집]


로마 역사상 수많은 암군과 폭군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칼리쿨라, 카라칼라, 네로 등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이거나, 호노리우스처럼 본인이 암군이긴 했지만 이미 제국이 완전히 멸망해가는 상황이라 황제의 권력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다는 걸 깨닫자 다 내려놓고 손만 빨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콤모두스만큼은 크게 재평가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참작사유라면 단독황제 등극 후 합리적으로 마르코만니 전쟁을 휴전시키고 뒷처리를 꼼꼼하게 했다는 부분, 그리고 별 이유없이 암살사건을 두번이나 연이어 겪고 난 이후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신건강이 완전히 망가져 정상적인 황제로 책무를 할 상황이 못 된 개인사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참작사유 외에는 그 실상과 행보가 최악이었기에 앞세대의 비텔리우스, 다음 세대에 등장할 로마제국 최악의 미치광이 엘라가발루스, 동로마 제국 황제로 400여년 뒤 즉위한 포카스와 더불어 재평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대표적인 폭군이자 암군이다.


2. 다른 폭군들과의 비교[편집]


대중들에게 가장 유명한 암군으로는 흔히 칼리굴라[1]엘라가발루스, 폭군으로는 네로[3], 카라칼라[4]가 거론되며, 당대 로마인들에게는 카라칼라와 로마 제국에서 폭군 중 제위 세습의 부적격 사례로 함께 묶여 오늘날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로마인들에게 콤모두스라는 사람은 잔인함과대망상, 그리고 피의 굶주림으로 가득찬 광기로 집약된 무능한 구제불능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다. 당연한 말인데 카라칼라와 마찬가지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공인된 진짜 폭군인 만큼, 당대부터 지금까지 평가는 최악이다.[5]

그러나 콤모두스는 함께 묶이는 황제들과 비교해도 업적이 전혀 없는 무능한 황제였고, 로마인들에게는 네로와 함께 '함량미달의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에게 함량미달자란 일하지 않는 황제, 즉 취미생활에 몰두해 본업을 내팽겨친 불성실한 황제 혹은 공직자를 뜻했고, 로마인들에게 황제나 원로원, 공직자가 해야 될 일이란 연설(eloquentia)과 문서(litterae)[6]에 연관된 행정처리와 로마법에 따라 국가 공공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회의를 주재하여 이를 논의하는 것을 의미했다. 도리어 로마인들에게 황제가 로마군 총사령관이라고 해도, 그들 사전에 황제가 손에 무기(arma)를 들고 싸우라는 것은 국가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후순위였고 황제들은 기본적으로 평시에는 문서를 직접 읽고 분석해 이를 서명하고 이에 대해 원로원에게 직접 보고할 책무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 역시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닌 이상 뒷전이었던 것이 숭무 정신이 강한 로마사회에서 당연한 상식이었다. 현대에도 이는 매우 당연한 상식이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들의 우주선을 격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상황이었으면 뒤에서 작전을 지시만 하고 있었어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이나 군주쯤 되는 수뇌부가 직접 야전으로 나가거나 각종 위험한 일을 손수 수행하려다가 현장에서 사망하기라도 하면, 지휘부가 붕괴되어 국가가 대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7].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중국 오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도 같은 이유로 창업군주인데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로마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개인적 슬픔과 비극조차 극복해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야 될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 하드리아누스처럼 일처리를 잘 했다고 해도 제국 순방을 다니며 예술가적 기질을 뽐내는 것은 욕을 면전에서 먹어도 될 이유였고, 황제라는 사람이 멘탈이 깨져 일을 내팽겨친 것은 사람 구실도 못하는 것을 뜻했다. 괜히 그 까칠한 하드리아누스가 민중들이 경기장에서 자신에게 패드립을 날려도 이에 관하여 변명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욕을 먹었던 것이 아니며, 선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막내아들의 요절에도 모든 책임을 다한 다음에야 슬퍼했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장 일개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지각이나 태만은 제명 사유였으니, 황제 쯤되면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로마 제국1453년에 멸망할 때까지, 자국의 황제를 일반적인 전제군주라기보다는 공화국의 세습 공직과 같이 여겼으므로, 다른 나라의 군주보다도 황제의 책임이 더욱 막중했다.

그런데 콤모두스는 업적도 전혀 없는데다, 황제라는 직책도 이해 못 한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5살부터 로마 최초로 제왕교육을 받고 제위에 올랐음에도 재위 2년만에 대놓고 태업을 벌였다. 과거 네로처럼 약간의 업적이 있어도 대놓고 가수, 운동선수, 연기자, 시인, 미식가로 활동해도 손가락질 받는 로마 사회에서, 누나에게 암살 시도로 충격을 당해도 훌훌 털고 일어나기는커녕 모든 일을 측근에게 맡기고 대놓고 검투사 활동을 하면서 놀고 먹는다? 이만하면 로마인들의 풍습과 사고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 지 충분히 예상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비슷한 부류 정도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칼리굴라, 카라칼라와 달리 현대에 이르러서도 재평가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재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분명 폭군이자 암군인 네로와 달리 업적조차 전무하다고 비난받고 있다.

2.1. 칼리굴라, 네로와의 비교[편집]


먼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폭군들로 인식되고 있는 칼리굴라와 네로에 대해 살펴보자면 두 사람 중 전자는 폭군보다는 암군 내지 재위 3년 10개여월 만에 측근인 근위대의 배신으로 암살된 황제였고 그마저도 암군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후자는 폭군인 것은 맞았지만 암군에 가까운 황제였다는 것이 오늘날의 평가다.


2.2. 칼리굴라의 악선전 관련[편집]


칼리굴라는 콤모두스처럼 ‘사치와 성적 쾌락, 폭력에 집착했던 무절제한 미치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기록은 세네카의 기록,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디오가 이 두 사람 주장을 인용한 기록에서 시작된 이미지였다. 근대 이후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칼리굴라의 실제 모습은 통치 내내 로마 제국이 굴러갈 수 있는 정책들을 유지했던 황제로, 비정상적이고 짧은 제왕교육, 없다시피한 원로원 활동,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이어진 통제된 삶을 경험한 사람답지 않게 꽤 나쁘지 않은 황제였다. 그는 이미지와는 달리, 콤모두스처럼 측근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사를 돌봤고 당대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필로 등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비난받는 ‘사치가 심했다’, ‘티베리우스의 유증금들을 마구 퍼줬다’는 부분은 20, 21세기 로마제국의 국고상황, 주화 발행연구, 빵과 서커스, 공공 건축물 개보수 연구 등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고 비난을 위해 꼬투리 잡은 것들로 드러난 상황이다. 설령 사치가 진짜 심했다고 한들, 칼리굴라의 유증금 중 흑자 전액 소모 이야기는 네로, 콤모두스처럼 언제까지나 본인이 닥치고 한 사치가 아니라, 즉위 후 ‘빵과 서커스’라는 로마 황제들의 즉위 초 인기영합정책이었다. 또 세네카의 주장처럼 황제의 무분별한 사치와 기행으로 국고를 파탄직전으로 몰고간 것도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진 상태다. 실제 21세기 들어 발표된 연구자들의 발표에 따르면,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의 말처럼 칼리굴라가 돈을 마구 쓴 나머지 국고가 바닥났다거나 황제가 이를 위해 매춘세 같은 이상한 세금들을 만든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칼리굴라 시대동안 병사 월급은 잘 지급됐고, 국고 상태와 내정 상황도 이미지와 달리 계획적이고 건실해, "38년 위기설, 39년 위기설 중 무엇이 그 잘난 세네카, 수에토니우스가 떠든 재정위기인지 묻겠다."고 사실을 안 연구자들에게 조소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8] 이는 사라져서 알 수 없는 타키투스의 기록에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칼리굴라 암살 사건 직후 황숙 클라우디우스아레키누스 클레멘스프라이토리아니 9개 대대 전 장교, 병사들에게 충성 보너스를 일시불로 즉시하사한 돈은 칼리굴라가 건전하게 관리한 황제 국고 안에서 내줬던 돈이었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 본인과 황실 일가 전체가 세야누스라는 사람 한명에게 멸문될 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 즉위 초반 직후부터 노골적으로 자신과 율리우스 가문을 우상화했다. 여기에는 초기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 선대의 두 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끝없이 벌어진 원로원 내의 황제 암살 시도가 끝없이 진행돼 칼리굴라는 4여년의 재위기간 내내 끝없는 암살 미수 사건에 시달리고 있던 영향도 컸다. 그러나 그는 암살미수 사건을 친척, 여동생들, 현직 집정관 등에게 겪는 가운데에서도, 콤모두스처럼 멘탈이 깨져 완전히 손 놓고 당하거나 태업한 황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선황 티베리우스 밑에서 연마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 원로원과 반대파를 법적으로 기소해 견제하고, 기사계급 인재들을 하나둘 추천해 밀어주며 권력강화에 집중했다. 물론 칼리굴라는 근위대와 반대파들을 견제할때 후기 로마 황제들이나 헬레니즘 제국의 절대 군주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무자비했고, 스스로를 자기우상화하며 자기신격화하는 행동을 벌여 이 문제로 유대인들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2.3. 칼리굴라의 통치 방향[편집]


계속된 암살 위협 속에서 자연스레 통치방향 역시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비슷해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어졌다.[9] 그러다가 그는 4년여 만에 원로원 내 공화정 복귀론자들과 황실관리, 칼리굴라의 방식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 일부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살해됐다. 이 암살은 아예 제정을 없애고 카이사르 이전 체제 회귀를 위한 사건이었는데,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 후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를 없애고 기록말살형시키려는 움직임을 가져갔다. 그러나 원로원 내부에서도 베스파시아누스 등 소장파들이 반역이라고 칼리굴라 암살범 처벌을 요구하고, 원로원은 끝없는 논쟁 속에서 그나마 믿었던 수도경비대, 소방대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암살자들이 제거하려다가 죽이지 못한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는 암살범들에게 근위대병영으로 인질 겸 협상카드로 끌려갔다가, 황제로 추대됐다. 이때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의 도움 아래 그는 완전히 근위대를 장악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 측근들과 친황제파 인사들이 집결해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는 하루도 안 되어 완벽히 제압됐다.[10] 대중들과 상류층에게는 중병을 앓았던 이력과 그를 깎아내리던 소문들이 엮이면서 그가 죽고 백여년 뒤 역사가들(특히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오늘날까지 ‘미치광이’, ‘근친상간하는 변태’ 등으로 불리며 까이게 됐다. 또한 이 소문들은 2차, 3차 가공돼 진짜 그가 한 일이 되면서 민중들에게도 구제불능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됐다.

마우레타니아 문제처럼 본인의 순수한 실책으로 제국 내에 소요를 일으킨 사건도 벌어졌다는 주장 역시 이젠 악평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칼리굴라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그가 마우레타니아를 둘로 쪼개 정규군을 적절히 배치해 대처한 전략은 좋은 평을 듣고 있다.


2.4. 칼리굴라의 치적[편집]


칼리굴라는 전반적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내린 중요 결정들을 제멋대로 교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지시와 결정으로 로마 시에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교 건설, 그리스 일대의 경제 활성을 위해 만든 운하 건설이 시작됐고, 그가 남이탈리아 항구 건설을 입안해 즉시 시작하고 로마 외항 건설 및 확장까지 생각한 것은 후임자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오스티아 항만 건설로 이어져 로마와 이탈리아의 지긋지긋한 곡물 수송, 수출 문제 해결의 토대를 마련했다. 속주 정책 역시 알렉산드리아 일대의 유대인 문제 등 의외로 가려진 업적 등이 꽤 있다. 또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경제, 사회 정책들도 칼리굴라가 입안했거나 실행에 옮긴 부분이 이어진 것이 의외로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주장되는 기행과 악행[11]들도 오늘날 로마사 연구자들의 대차대조 결과, 거의 대부분 사실무근의 뜬소문으로 결론내려지면서 과거처럼 콤모두스와 함께 묶일 폭군으로는 분류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칼리굴라는 정치력 부족과 개인적인 성격 결함으로 실패한 황제인 건 맞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는 달리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폭군으로 낙인찍힐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제국에 폐를 끼치지도 않았으며, 행정적으로는 유능하기까지 했다.


2.5. 네로 관련[편집]


네로는 칼리굴라와 함께 폭군으로 엮여 까이는데, 그 역시 문제가 있었기는 해도 콤모두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폭군은 아니었다. 영화나 대중매체, 코미디 등을 통해 네로는 콤모두스처럼 놀고 먹는 막장 황제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네로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정무는 계속 봤고, 제왕교육 수업 없이 갑자기 즉위했어도 행정 능력은 평균은 됐다. 외교 부분에선 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감각을 물려 받았는지, 안목이 좋고 몇 수 앞을 보는 황제였다. 특히, 파르티아 문제 등의 외교정책 성공은 트라야누스 시대 이전까지 대 파르티아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 또 그가 까이는 사건이자 몰락의 시발점인 로마 대화재 역시 마찬가지다. 죄없는 기독교도들에게 방화죄를 덮어 씌운 것은 분명히 그가 잘못한 행동이지만, 네로는 오늘날 알려진 “불타는 로마 시내를 보면서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와 달리 휴가 중 로마 대화재라는 엄청난 사건을 보고받고, 눈물날 정도로 앞장서 이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줬다. 또한 네로가 사치를 위해 속주세를 인상하고 직계 가족, 방계 황족, 귀족, 부자들을 반역죄로 숙청했어도 콤모두스처럼 검투사 놀이를 한다고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취미활동에만 매달린 사람은 아니었다. 즉,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네로 역시 콤모두스와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은 하는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2.6. 네로와 콤모두스의 사치[편집]


네로는 콤모두스처럼 사치가 심했다. 특히 그는 콤모두스와 달리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나친 심취[12]로 당대에 평가가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화재 전에 로마는 아름답지 못해서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 데다가 화재 후 복구 사업 때 자신의 궁전을 크게 지으려고 한 부적절한 처사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이 찍히게 됐다. 그러나 네로는 이런저런 이벤트도 많이 열었고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해서, 사후 본가 개인 무덤에 묻힌 그의 묘소에 매일 꽃이 바쳐졌을 정도로 일반 시민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황제였다.

콤모두스는 첫 2년간은 무난한 황제였지만, 누나의 사주로 별 이유도 없이 암살될 뻔한 이후 아예 정치할 생각을 아예 그만둔 황제였다. 더해 그는 뒤에 등장할 카라칼라처럼 정신적 트라우마 속에서도 본인의 관심을 살려,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인물도 아니었다. 당연한 말인데, 카라칼라처럼 군사행동, 군공과 군제 개편 같은 부분에 열정과 업적을 보여줘도 욕먹는 상황에서, 아예 은둔통치 후 나라를 내팽겨쳤으니 욕을 안 먹는 것이 이상했다.

어떻게 보면 로마인들에게 기행으로는 한수위였던 엘라가발루스와 비교해, 정신건강이 완전히 망가진 상황에서도 로마문화를 무시하고 반인륜적 기행이나 해괴한 짓은 안 했다. 하지만 상술했듯 그는 엘라가발루스처럼 고향 레반트에서 태양신 신관 수업을 받고 있다가 카라칼라 암살 후 외할머니 마이사의 도박으로 황제가 된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처럼 아무런 일도 안하고 놀고 먹은 황제라도 제왕교육을 멀쩡히 잘 받은 사람이 제 역할을 그만뒀다는 부분에서, 로마인들과 후세 사람들에게 더 비난받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콤모두스가 엘라가발루스보다 최악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당대나 오늘날까지 두 암군 모두 같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기행을 벌이고, 매관매직과 무관심으로 나라를 방치한데다 업무대리인으로 지정한 인사들도 족족 문제가 많았다고 해도 그 결만 살짝 다른 부류의 암군이기 때문이다.


2.7. 반농담 재평가[편집]


일부는 반농담삼아 “검투사로 활약하며 전문적인 검투사들은 죽이지 않고 범죄자들을 죽였으니 범죄율이 떨어졌을 것 아니냐”며 재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반농담일 뿐이다. 멀쩡하게 있는 국법을 무시하고 범죄자를 황제의 심심풀이용으로 죽인다는 것도 분명 문제이며, 사적 처벌을 허용해서 피해자에게 처벌권을 준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도 재평가는 어려운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콤모두스는 현대 로마사 학자들에게 당대에 폭군으로 공인돼 까인 도미티아누스나, 오늘날에는 암군이어도 기록처럼 막장 내지 폭군은 아니었다고 평가받는 칼리굴라, 네로처럼 재평가조차 못 받고, 말 그대로 나라를 방치한 채 이후 온갖 부작용들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까이고 있다.


2.8. 제국 방치[편집]


그는 말 그대로 나라를 방치한 덕에, 당대와 후대 로마인들에게 세트로 합쳐져 욕먹는 카라칼라처럼 국고를 바닥나게 만들어서 200년 넘게 유지되던 조세 체계 등을 뒤흔드는 행동, 다시 말해 폭정이든 실정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이 부분에서 욕을 덜 먹었다. 그러나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결과에 따른 의견이 나뉘고 있고 긍정적인 부분도 많아 콤모두스와 동급이라는 로마인들의 평가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콤모두스는 로마인들에게 공인된 폭군이었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제국에 어떠한 공헌도 해주지 않았다. 아울러 콤모두스는 사후 그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을 때, 했던 일이 하나도 없어서 원로원에서 지울 기록이 한 가지도 없었다고 이 부분에서도 욕을 먹었는데, 그런데도 기록말살형을 선고한 이유가 뭐냐면 이 정도 악질 폭군은 한 게 없어도 기록말살형을 받는다는 선례를 남겨야 다음 황제들이 지킬 건 지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콤모두스가 말년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해도, 오직 여흥과 취미생활 분야에서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카라칼라와 달리 자신을 욕하는 일반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학살하는 행동은 없었다. 이는 그가 로마인들에게 "천성까지 악한 사람이 아니다"고 평가받은 이유인데, 실제 콤모두스는 잔인함으로 질타받은 네로,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와 비교해 인간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콤모두스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해도 한번 제대로 성질을 부리면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재산을 전부 뺏은 행동 외에는 가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숙청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는 카라칼라나 동서고금에서 폭군으로 공인된 군주들에 비하면 약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왕권이 어쩌니 하면서 신하들에 대해서 스토커적 감시를 하며 최대한의 경계를 하는 전제군주들에 비하면 아주 점잖은(?)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콤모두스가 제위에 앉은 12년은 기근, 홍수, 전염병, 야만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아버지, 삼촌의 통치기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시기였다. 하다못해 그의 치세에 노예,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언급이나 이야기도 없다. 여기에는 그가 마르코만니 전쟁 휴전 당시, 놀라울 정도로 평화교섭과 사후조치를 잘 취한 것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를 괴롭힌 다뉴브 강 일대의 게르만족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처럼 공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치세 내내 전쟁을 치루면서 게르만족(콰디족, 마르코만니족 등)의 전력에 피해를 입힌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한 대비가 소홀하다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자 나섰던 황제였고,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준 덕에 콤모두스 치세기가 평화를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2.9. 총론[편집]


그럼에도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아 평화조약을 맺은 뒤, 과거 하드리아누스처럼 내치에 전념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누나 루킬라의 암살시도가 큰 영향을 끼치진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암살 위협을 겪고 난 이후부터 아예 제국을 내팽개쳤고 기본적인 인사정책까지 방치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번영기에 즉위했고 주변에 훌륭한 고문과 관료들이 많았음에도, 제국을 박살냈다고 일관된 비난을 듣고 있다.

두 차례 암살 위협을 겪으면서 생긴 강박증과 암살에 대한 공포, 의심병으로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옹호의 여지가 있다고 쳐도, 콤모두스는 오랜 평화기 직후, 여러 문제가 대내외적으로 터져 고생한 아버지와 비교해 안정적인 상황에서 즉위했음에도 불성실한 데다 모든 것을 방치할 정도로 무능했다. 이런 까닭에 즉위 직후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서둘러 종결짓고 돌아온 이후 그의 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정치나 국방에서는 문제점이 하나도 개선된 게 없었다.

또한 콤모두스가 완전히 정사를 내팽개치고 측근들에게 나라일을 맡기면서 근위대장의 시대가 시작되는 후유증까지 생겨났다. 물론 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제국은 통치해야 하니 근위대장들에게 떠넘긴 셈인데 콤모두스 초기에 국가를 통치했던 페렌니스는 근위대장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시절까지의 문민 통치가 이때부터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로 전환된다. 그나마 페렌니스는 일을 제대로 하긴 했지만 그가 피살되고 그 뒤를 이은 클레안드로스는 아주 탐욕스러워 제국을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었고, 이제 지방 정부에서 딴 생각을 품고 비위를 저지르더라도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콤모두스 시대 이후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해 이후 황제인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장인 레토에 의해 피살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내전 당시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자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나라를 안정시켰지만, 스스로 군인황제를 자처한 세베루스는 커져버린 근위대의 힘을 이용해 선군정치를 벌이면서 이후의 로마 제국의 군국주의화가 시작되는 결과까지 연결됐다. 또한 콤모두스 암살과 페르티낙스가 피살된 직후 곳곳에서 군대가 들고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속주에 대한 감시도 이때부터 해이해졌다. 따라서 여러모로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기하는 황제라고 공인되듯 평가받고 있고, 실제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콤모두스의 치세부터 시작되고 있다.

더해서 콤모두스 시대 이후부터 하필이면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되고 제국의 재편성이 필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터져버리면서, 짦지도 않은 그의 치세기동안 본인이 고집을 피워 서둘러 강화조약을 맺고 재정비할 시간조차 방치한 부분 역시 그가 로마 제국이 변형되고 해체되는 결과의 시발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로마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 기질은 뛰어났고 또한 특별히 대형사고를 친 것도 없으며 시민들을 핍박하거나 무리한 세금징수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제국이 그의 치세 중에 막장으로 치닫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다. 사실 로마 제국의 막장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황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였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처럼 그럭저럭 수습만 했을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 게 그 증거다. 다만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막장화 수습에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초동 진화에 성공했다면 쇠퇴가 꽤나 미뤄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2.10. 기타[편집]


의외일지 모르는데, 현제로 알려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콤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콤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완전히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콤모두스의 애첩이 된 마르키아의 입김 또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키아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해서 기독교 박해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기독교도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그의 얼마 안 되는 선행 중 하나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신고해도 콤모두스 황제가 무시하고 기각했던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로 짐을 귀찮게 하지 마." 정도의 대응이었고 큰 연관성은 없겠지만 그를 시해한 암살건에 가담한 후실황비가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잠시나마 기독교 공동체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계속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정말로 큰 업적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선황 아우렐리우스에게 탄압을 받은 기독교가 콤모두스 치세에 연속해서 궁지에 몰리지 않았기에 다른 건 몰라도 기독교 문헌이나 교황청에서 콤모두스를 사도신경에서 언급하는 본디오 빌라도처럼 지적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이유로 기독교가 제국을 장악한 로마 말기나 중세 유럽에 신나게 혹평당했고, 그의 기마상이나 동상은 보는 즉시 파괴될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2.11. 부자세습제의 폐해?[편집]


콤모두스는 여러 폭군 중 위에서 언급했듯이 카라칼라와 세트로 묶여 로마 제국 부자세습제의 폐해의 아이콘으로 공인돼 비난받고 있다. 따라서 로마 최고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 사후 내란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모두 뒤를 이은 아들들이 폭군이었던 까닭에 이 부분에서 비난받고 있다.[13]

콤모두스의 즉위 후 막장에 가까운 면모 때문에 당대부터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모두 사후 아들의 악행과 실정 탓에 자식교육을 못 시켰다고 비난받고 있다. 모후 파우스티나는 아들의 검투사 놀이 덕에 휴양지에서 검투사들과 바람이 나서 얻은 아들이 콤모두스이고,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비방성 소문의 피해자가 돼 대중매체에서 문란한 황후로 알려지게 됐고, 로마 최고의 무결점 명군이었던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완전히 반대로 나라를 이끈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줬다고 강하게 비난받고 있다.

아울러 콤모두스의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폭군으로 놀고 먹은 조카 덕(?)에 후대 로마인들에게 “삼촌이라는 작자가 금발머리 자부심 내세우고 외모만 신경쓰고 눈치없이 경박하니, 조카가 어릴 때 그걸 보고 뭘 배웠겠냐?”라고 욕먹고, 후대 로마인들은 그를 조카 콤모두스와 세트로 묶어 아예 잘난 형 덕에 황제 타이틀만 얻고 밤낮으로 놀기만 하다가 죽은 황제로 기록하면서 비난했다.[14]

콤모두스의 부모에 대한 이런 비난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 후임황제들 입에서 그의 부모와 작은아버지까지 공식석상 자리를 통해 공개적으로 언급될 정도였다. 콤모두스 못지 않은 폭군이자 로마 제국 시스템 전반을 완전히 헝클어 놓았다고 까인, 카라칼라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즉위 후 원로원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식농사에 실패했다고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로마 최고의 명군을 욕했는데, 이는 이 사람 혼자 언급한 작심발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이를 주요 떡밥 삼아 계속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아우렐리우스 부자를 싸잡아 욕하길 주저하지 않던 세베루스 역시 다른 오현제처럼 유능한 인사를 골라서 양자로 삼아 계승하지 않고 어린 아들들에게 제위를 물려줬다. 특히, 그의 장남은 콤모두스와 달리 10대 초반의 나이부터 그 위험성을 드러낸 카라칼라였고, 차남은 형이 분노조절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와 대립각을 세운 게타였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 본인은 두 아들 사이가 원수보다 못한 최악임을 알고 있음에도 상황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15]

사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오현제, 즉 같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전임자들이 양자를 세워 제위를 물려준 이유는 선대 황제 4명 모두 처음부터 제위를 물려줄 만한 친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아들이 있던 그의 입장에서 더욱이 멀쩡한 아들을 놓고 양자를 두기에는 리스크도 컸다. 전임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손자인 콤모두스는 혈통부터 정통성을 타고난 인물이었고, 정신병과 같은 매우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거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한 왕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와 달리 건강하고 체격이 상당히 좋은 활발하고 유쾌한 청년인데다 외모도 막장으로 치닫던 암살직전에도 로마인들에게 “남자답게 잘생기고 건장하며 금발머리는 햇볕을 받아 밝게 타오르는 듯 돋보였다”고 이야기 나올 정도였다. 또 그는 아버지 사망 직후 루킬라에게 첫 암살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다소 철없게 행동하긴 해도 그 나이대에 맞게 철이 없고 경박하다고 이야기가 나왔고, 정치에도 나름 관심이 있고 자기 스스로 사생활적으로 절제할 줄도 알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콤모두스는 즉위 전부터 포악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드러낸 후계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부모 모두로부터 확고한 혈통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멀쩡한 아들을 두고, 양자를 세워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비난이었다.

이는 당대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아무리 통치를 잘했어도, 자식 농사를 망쳤다”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강하게 비난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비난받은 마르쿠스가 서로 결이 다른 선택을 했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가장 큰 이유다. 당장 콤모두스 부자를 싸잡아 욕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죽기 직전 유언에서 언급했듯이 두 아들이 제국을 쪼개 나누거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벌일 것을 확신하듯 예감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를 무척 걱정했다.

또 그는 차남 게타를 공동후계자로 내세운 이후에 이미 파르티아와의 전쟁 후 동방에 머물다 귀국 직후 분노조절 제어 등에 어려움을 겪던 큰아들의 잔인함과 위험성을 직접 경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즉위전부터 장인, 아내, 처남 등을 죽이고,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한 장남과 그런 장남과 원수지간이었던 차남 게타에게 제위를 물려줬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죽고 난 뒤 상황을 예측했음[16]에도 이를 강행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욕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두 아들을 제치고 다른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그나마 셉티미우스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카라칼라가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이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도, 군사적 재능을 즉위 후 유감없이 발휘할 정도로 군제개편이나 제국 방위에는 큰 공을 세워 폭군이어도 콤모두스같은 폭군+암군은 아니었으므로 제국이 카라칼라 사후에도 한동안 안정기를 누려 차악의 선택이었다는 비난 정도일 것이다.

즉,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멀쩡한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선정 당시 당연했고, 만약 아우렐리우스가 양자 계승을 시도했다면 내전을 일으킬 명분을 주는 것이니 친아들인 콤모두스가 자신이 정당한 친자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대항해 로마 제국이 난장판이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조 국가에서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내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말아먹는 사례는 역사에서 매우 흔했다. 굳이 지적하자면 자식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는 전제군주제 자체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
[1] 재위 4여년 만에 자신의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칼리굴라의 경우, 대도시 로마로 직접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교 2개를 건설하기로 계획해 실행에 옮기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항구들과 인프라를 신설, 정비해 동시대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우려와 달리 이탈리아 경제를 안정시켰고 곡물 수송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로마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그는 그리스에 운하를 파게 해 동방 속주 일대의 경제를 활성화시킬 기반을 만들었으며 황제의 조폐주조권 완전장악 조치도 진행돼 후임황제들의 정책 계획과 정책 추진에 공헌했다.[2] 물론 이미지와 다르게 권모술수에 능한 권신이긴 했다.[3] 초기에는 세네카[2]의 도움으로 선정을 펼쳤다. 세네카의 은퇴 이후에도 외교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보이며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주도했으며,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 역시 뛰어난 인선으로 진화에 성공했다. 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로마 대화재 때도 후일 불탄 곳에 자기 궁전을 지어 욕은 먹었어도 화재 당시에는 어떻게든 불을 진화하고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4] 로마군 군제 개편, 예방 전쟁 등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5] 카라칼라의 경우에는 콤모두스와 달리 암살 후 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폭군인 것과 별개로 방위선 및 경제 개혁을 통해 3세기의 위기를 멸망 없이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한 공은 인정된다.[6] 공화정기 집정관, 원수정(프린키파투스)기 황제가 다뤄야 할 문서는 회계문서와 민원문서(탄원서, 판결서, 총독의 서한 등)였다. 이중 로마 황제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업무 대부분 시간을 잡아 먹은 것은 민원문서였다.[7] 당장, 같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에도 이런 사례가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스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의 군대를 직접 맞서서 상대했다가, 발렌스 본인을 포함해 여러 장군들과 주력 부대가 전멸하는 참사를 겪으면서, 이후에 고트족 및 훈족, 아바르족 등의 이민족들의 침략을 겪으면서 극심한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8] 칼리굴라가 돈을 많이 쓴 것 자체는 사실이나 이는 선황이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가 닦아놓은 탄탄한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칼리굴라 본인도 할아버지가 이룩해놓은 재정적 흑자 안에서만 자금을 운용했다.[9] 칼리굴라는 8개월만에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직후부터 너무 빨리 원로원과 대립하면서 원로원 내 인기가 떨어졌다. 그는 사촌이자 조카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인 이후, 원로원에게 자신과 누이들에 대해 신격화 형식으로 충성을 맹세케하고 속주 총독임명권과 조폐발행권까지 빼앗아 암살 직전 원로원 내에서 불만이 상당했다.[10] 실제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공화정 복귀 및 칼리굴라와 카이사르 일가 전체 기록말살형 시도 움직임의 낌새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을 만나 원로원에게 죽은 조카의 기록말살형 같은 선 넘는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물론, 원로원에게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은 정중함이 포장된 협박이었고, 마지막 경고였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게 부탁할 당시, 근위대 내 칼리굴라 암살참가자들과 대대장들을 색출해 전부 죽인 상황이었고, 로마 내 정보를 장악한 뒤 원로원이 황제국고까지 카파톨리노 신전에 옮기는 등 반역행위로 처벌 받을 일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클라우디우스는 일찌감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업적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여론을 완전히 친 황제여론으로 돌려놨고, 이탈리아 내에서 유일한 무력집단인 근위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설상가상 즉위 직후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싱겁게 끝나 원로원 입장에서는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을 들어주는게 판갈이 당하지 않고 겨우 체면치레할 상황이었다.(물론 클라우디우스는 이후 의심가는 인사들을 원로원 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판갈이해버리고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속주 태생 인재들에게 원로원을 개방한다.)[11] 대머리에다 온 몸에 털이 북실북실한 괴물이었다, 간질환자였다, 자신의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맺었다, 앞줄에서 관람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부자들을 사자밥으로 던져줬다, 원로원 의원들의 부인들을 희롱하고 개처럼 발정했다, 할아버지 티베리우스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고 돌아와서 슬픈 연기를 했다, 매춘세를 신설하고 가문의 온갖 재산을 내다 팔았다, 하늘에 큰 재해가 나길 기원했다, 자신의 애마를 집정관으로 삼았다 등.[12]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많이 수용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1세기까지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로마인이 많았다. 철학만큼은 예외였지만 그것도 쾌락주의 같은 경우는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네로의 그리스 문화 애호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화가 완료된 동로마 제국 때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13] 다만 카라칼라는 콤모두스와 달리 폭군일지언정 암군은 아니었고 원로원도 인간성은 매우 나쁘지만 그와 별개로 제국의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방위체제를 재건한 업적은 인정해야 할 황제로 취급해서 죽은 뒤 신격화를 비롯한 모든 예우를 정상적으로 받았다.[14] 루키우스 베루스는 자신의 외모와 금발머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남이긴 했지만, 적어도 놀고 먹는 듯한 이미지여도 본인이 할 일은 진짜 최선을 다하면서 놀았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동생에 대해 형으로서 많은 인내심을 갖고 살면서도 아주 사랑했다고 직접 기록했다. 또 그는 놀고 먹다가 요절한게 아니라 게르만족이 본국 이탈리아 북부로 쳐들어온 뒤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위기상황에서 마르쿠스와 함께 군을 이끌고 싸운 뒤 로마로 돌아가다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다.[15] 카라칼라와 게타는 일찍부터 서로 이미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상태라서 집정관 공동취임도 아버지가 황제로서 명을 내려 강제로 화해시키고 가까스로 취임시킬 정도로 험악했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요크에서 숨이 거의 헐떡거린 순간까지도 두 아들에게 “사이좋게 지내고, 항상 믿고 의지해라”고 간곡히 부탁할 정도였다.[16] 세베루스의 걱정처럼 그의 두 아들은 서로 대립하고 황궁까지 반으로 나눠 사용했으며, 매일같이 내치 전반에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제국을 동서로 나눠 통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분할 약속은 어머니의 반대로 실패했고, 결국 1년 만에 골육상쟁이 발생해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 앞에서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들 20,000명까지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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