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후리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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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19년 세워지고 1045년 몰락한 왕조.

한때 보로부두르를 세우기까지 하면서 패권을 누렸던 마타람 왕국은 시간이 지나며 쇠락했다. 특히 저멀리 수마트라섬스리위자야 왕국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 조금씩 약화되었던 것. 그러던 중 스리위자야 왕국이 마타람 왕국의 신하들 중 하나였던 우라와리를 지원해 반란을 선동했고, 결국 우라와리가 마타람 왕국의 수도 와투갈루를 공격해 불태우면서 마타람 왕국은 멸망하고야 만다.

그와중에 와투갈루의 대재앙에서 피신한 왕족이 단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르마왕사 왕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Airlangga, 990-1049)였다. 아이를랑가는 3년 후인 1019년에 와해된 마타람 왕국의 호족 세력 일부를 규합하여 카후리판 왕국(Kerajaan Kahuripan)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스리위자야가 남인도의 촐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약화되어 자바에 간섭하기 어려워진 틈을 타 아이를랑가 왕은 마타람의 고토로 진격, 주변 군소 세력을 정복해 나갔으며 1032년에는 반역자 우라와리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계속된 아이를랑가의 원정으로 카후리판 왕국은 마타람의 기존 강역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동부 자바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1] 아이를랑가는 맏딸 상그라마위자야 공주(Sanggramawijaya)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시도했으나,[2] 그녀가 출가해 승려가 되자 1045년 어린 두 왕자에게 왕국을 둘로 쪼개 나누어주곤 본인 역시 속세를 떠나 수도 생활으로 들어갔다.

이후 카후리판 왕국은 동쪽은 장갈라 왕국, 서쪽은 크디리 왕국으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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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를랑가 왕은 문학과 예술 발전에도 신경을 썼다. 1030년대 초 궁정 시인 음푸 칸와(Mpu Kanwa)는 아르주나의 이야기를 다룬 《아르주나위와하》(Kakawin Arjunawiwaha)를 아이를랑가 왕의 후원으로 완성하였는데, 작품의 주인공 아르주나는 아이를랑가 왕의 알레고리로 읽힌다.[2] 아이를랑가의 왕비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위(Dharmaprasadottungadewi)는 촐라 제국의 침공에서 도피한 스리위자야 왕국의 공주, 혹은 적어도 왕과 가까운 왕족이었다. 1035년 아이를랑가 왕은 '스리위자야스라마'(Srivijayasrama)라는 불교 사원을 지어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위 왕비에게 헌정했는데, 이 역시 왕비가 스리위자야 왕국의 고위 왕족이라는 설에 대한 간접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