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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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인석(崔寅奭)
본관
삭녕 최씨[1]#
출생
1957년
경상남도 사천시
학력
대아고등학교
부산대학교 법학과
경력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16기
부산고등법원 판사(1997)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판사
창원지방법원 거창지원 지원장(1999)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지원장(2005)
창원지방법원 수석부장 판사(2009)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2010)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 판사(2012~2014.2)
부산가정법원 법원장(2014.2~2016.2)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2016.2)
제주지방법원 법원장(2017.2~2018.2)
제주특별자치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울산지방법원 법원장(2018.2~2019.2)
부산광역시 법무법인 상유 대표 (2019.3~)
종교
개신교(장로회) 장로
SNS
페이스북

1. 개요
2. 생애
2.1. 노건평 사건
2.3. 청소년들을 위한 법원장
2.4. 퇴임사



1. 개요[편집]


대한민국법조인. 울산지방법원 법원장으로 전보되었다.
2019년 2월 퇴임후, 부산에서 법무법인 상유의 대표 변호사 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편집]


최인석은 1957년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의 풍정마을의䈌山 최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아고등학교부산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육군만기전역자 이다.

사법연수원 16기중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어 부산, 경남 지역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제주지방법원장을 제외하면 전부 부산고등법원 산하의 법원에서 근무하였다.

2007년 판사재임시절, <다음>카페에 개설되어 있는 '좋은 사법세상을 찾는 모임'은 회원들의 투표와 일련의 선정과정을 거쳐 최인석 판사를 올해의 국민의 판사로 선정하고 수상하기로 했다.

최인석 판사는 군사정권 시절 경상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사건에서 보여준 인권보호와 노무현 정권 초기 대통령 측근의 감치재판사건 등으로 보아, 원칙과 소신을 가진 강직한 판사"라며 "우리나라 최초 동영상 재판의 단추를 여신 분으로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법세상 구현을 시도해 선정했다"고 밝혔다.

2019년 2월 퇴직후, 부산시 법조타운에서 법무법인 상유의 대표 변호사로서 이어 나가고 있다.


2.1. 노건평 사건[편집]


창원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2004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측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 씨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면서 “대통령 친인척이 폼 내고 살면 그 부담이 대통령에게 돌아가는 만큼 처신을 조심해 물의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며 3분 동안 훈계를 하기도 했다. 재판 직후 그는 건평 씨에게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2.2. 아덴만 여명 작전[편집]


삼호 주얼리오 피랍사건 2심 판사

2011년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하고 석해균 선장을 살해하려 한 혐의(살인미수 등)로 기소된 소말리아 해적 5명에 대한 항소심 첫 재판(8일 부산법원 301호 대법정)은 1심과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국민참여재판이었던 1심 재판과 달리 일반 재판으로 진행된 이유도 있지만 재판장인 부산고법 형사1부 최인석 부장판사(54·사법시험 26회·사진)의 입담 덕분이었다.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된 재판은 소말리어 통역인이 부산행 고속철도(KTX)를 늦게 타면서 1시간 반가량 지연됐다. 최 부장판사는 “이번 재판 주연이 저인 줄 알았는데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첫 ‘웃음 포문’을 열었다. 재판이 시작됐지만 통역인이 도착하지 않자 그는 “오늘 지각한 소말리어 통역인도 판사 생활 25년 경력인 저보다 일당이 비싸다”고 말해 방청석 곳곳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부산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최인석) 심리로 301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부산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최인호)는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20) 등 1심에서 징역 13∼15년을 선고받은 소말리아 해적 4명에 대해 1심과 같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2.3. 청소년들을 위한 법원장[편집]


천종호 판사와 함께, 청소년을 위했던 원장


2.4. 퇴임사 [편집]


우선 법원가족 여러분들께 2년 연속으로 법원장 퇴임식을 지켜보는 번거로움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후임 법원장은 울산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한번만 참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밖에서 오신 존경하는 여러분,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김인욱 인천지방법원장께서는 정년퇴직을 하면서도 퇴임식을 하지 않고 그냥 가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저는 뜻밖에도 퇴직할 무렵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바람에 그랬다가는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 그것도 제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로스쿨 학생들이나 법대생들과 대화하는 자리에 가면 이런 말을 묻습니다. 평소 가슴에 품고 사는 좌우명이 무엇이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일이라도 변호사 한다.” 다들 웃습니다. “내일이라도 변호사 한다는 뜻은 소신껏 살겠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이라도 변호사 하려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갑이 되거나, 내 고객이 될 수도 있는데 성의를 다해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고. 늘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내일이라도 변호사 한다고 했는데 그 내일이 30년이 될 지는 사실 저도 몰랐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그 내일이 ‘조만간’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지원으로 인사 발령이 나자 거침없이 교사직을 사표내고 따라 나섰다가 20번 가까이 이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처음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32년간 판사를 하면서 자랑이 있다면 저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재판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10년쯤 전에 했다면 못난 게 무슨 자랑이냐고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세월이 바뀌어 군인으로 치면 30년간 야전에서만 산 것을 이제 높이 평가하는 모양입니다.

어느 대법관께서는 퇴임사에서 이제 1심 합의 재판장을 하면 잘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대법관 깜은 되지 못하니, 참고로 저는 대법관 검증에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제 자랑입니다. 그게 왜 자랑이 되냐고요? 적어도 저는 제 주제파악은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1심 합의재판장까지는 몰라도 1심 단독 판사 정도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판사생활을 한 25년쯤 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액단독을 해 보니까 그럭저럭은 몰라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어쨌든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집이 없어져버렸고 차는 20만 킬로를 넘었습니다. 회복되기는 했지만 건강을 크게 상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34년쯤 된 옛날이야기입니다. 제가 장가를 들게 되었을 때 돌아가신 저희 모친께서 장모 되실 분께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 아들이 참 조용한 사람이기는 한데, 성질이 불같아서 며늘아가 고생할 건데...” 성질이 조용하기는 한데 불같다. 그런 성격이 어디 있을까요? 한 마디로 성질 더럽다는 뜻입니다. 까칠하고 괴팍하다는 뜻입니다. 아니더라고요? 아니 맞습니다. 30년간 키워온 어머니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제가 이 조직에 근무하면서 여러분께 괜찮은 모습을 보인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이 조직에 들어와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선배들로부터, 동료들로부터, 후배지만 존경할 만한 분들로부터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저의 언행이 여러분을 실망시킨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30년을 배우고 익혔으나 타고난 까칠함은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용서를 바랄 뿐이지요.

저희 모친이 장모님께 우리 아들이 성격이 조용하지만 불같다고 하셨을 때 그때 저희 장모님께서 하신 대답이 걸작입니다. “헉, 큰일 났네요. 우리 딸도 한 성질 하는데...” 저희 모친께서는 장모님 말씀이 인사치레로 하신 말씀인 줄 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너거 장모가 사람이 참 괜찮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장모님 말씀도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제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저의 밑천이 다 밝혀졌는데 저는 고등학교도 대학도 재수해서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다 시험 하나를 잘 치러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어쩌다 판사가 되어 법원에 들어와서 30년 동안 그걸 우려먹고 살았습니다. 그 동안 제 능력이나 인품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30년 이상 판사생활을 하고 법원장까지 지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제 스스로도 생각 못했습니다. 해보니 법원장은 바지사장입디다만 바지사장이라도 저는 법원장까지 할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법원이니까 조용하기는 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제 성깔이 용납이 되었지 다른 직장 같으면 벌써 쫓겨났을 겁니다. 그 점에서도 저는 법원에 감사드립니다.

보도진들이 와 계실 거니까 기사거리가 될 내용을 말씀드려야겠죠. 딱 2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권자인 국민과, 국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2022년부터는 법조경력 10년 이상이라야 됩니다. 그 규정은 판사, 특히 재판장이 너무 젊고 세상 경험이 없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벌써 판사생활 10년 않고는 재판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단독 재판장의 대부분이 경력 15년 이상의 부장판사입니다. 법조경력 10년 이상을 요구하면 판사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법원의 고령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 고치지 말고 미리 미리 다시 검토해 주실 것을 감히 부탁드립니다.

남아계신 판사님들께도 감히 한 말씀만 드리자면 헌법 정신에 투철한 재판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신체의 자유, 구체적으로 불구속 재판의 원칙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양쪽으로 갈라서서 싸우고 있는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판사는 헌법을 보고 나아갈 길을 정해야지 콜로세움에 모인 관중의 함성을 듣고 길을 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지만 법원은 위기에 있지만 우리 울산지방법원은 제 몫을 다했습니다. 시민들로부터 칭찬 많이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제 자랑입니다. 잠시 뒤에 낭송 순서가 있겠지만 이 시대의 인기시인 나태주 시인으로부터 퇴임기념 헌시까지 받고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여러모로 저는 행복하게 떠나갑니다.

이 좋은 사람들, 이 좋은 청사, 특히 이 좋은 테니스 코트 남겨 두고 떠나려니 참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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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사공파 21세 인(寅) 연(演) 항렬. 아버지 최유민은 20세 민(敏)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