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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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寔
(103 ~ 170)

후한 말의 인물이머 자는 자진(子眞) 또는 원시(元始)로 일명 태(台)라고 한다. 최원의 아들.

유주 탁군 안평현 사람으로 젊어서 침착하고 여러 전적을 좋아했으며, 아버지 최원이 죽자 묘지 곁에서 은거하면서 전답을 헐값에 팔아 무덤을 쓰고 송덕비를 세웠다.

장례를 마치자 재산이 없어 곤궁했기에 술을 빚어 팔아 생활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지만 최식은 끝까지 받았으며, 최식을 받을 만큼만 받았고 큰돈을 벌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자 삼공부에 초빙했지만 거절했고 환제 초에 선비들을 천거하라고 명령했는데, 최식은 군의 천거로 공거에 나갔지만, 병으로 대책에 응시하지 못해 낭관이 되었다.

최식은 관리로서 능력이 우수했고 정론을 저술해 국가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면서 국가 통치의 질서에 대한 입장을 제시했으며, 사민월령을 저술해 농작물의 재배를 포함해 각종 생활이나 의식에 대한 것을 기록했다. 태위 원탕, 대장군 양기가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았고 대사농 양부, 소부 하표가 글을 올려 최식이 뛰어난 인재라서 조정에서 일해야 한다고 천거하자 최식은 의랑에 제수받았다가 대장군 사마가 되어 변소, 연독과 함께 동관에서 근무했다.

이후 오원태수로 부임하면서 백성들이 방적을 알지 못하자 실을 뽑는 법을 가르쳐 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추위를 면하게 했다. 흉노가 해마다 운중군, 삭방군을 침입해 1년에 9번을 피난갈 정도였는데, 최식은 군사를 훈련하고 감시를 철저하게 하자 흉노가 감히 침입하지 못했고 변방에서 근무 실적이 가장 좋았다. 변방 태수가 되자 더욱 가난해졌고, 최식의 치적은 어머니의 도움이 컸으며, 어머니의 복상을 마친 후에는 상서가 되었다. 세상이 혼란하자 병을 핑계로 업무를 하지 않다가 몇 달 만에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으로 죽자 집안에는 사방의 벽 뿐이어서 염을 할 돈이 없자 광록훈 양사, 태복 원봉, 소부 단경이 관곽과 장례 물품을 준비했으며, 대홍려 원외가 송덕비를 세웠다. 최식이 지은 글은 15편이 있었다.

글씨를 잘 써서 최식의 글씨에 대해 장화는 장초의 고아함은 최원의 풍이 있었으니, 좋은 도야가 좋은 활을 만든다는 말의 의미를 실추시키지 않았다면서 매우 칭찬했다.

저서로는 정론, 사민월령 등이 있고 정론은 본래 6권이 있었지만 현대에는 1권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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