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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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읍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선
2. 마산합포구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선



1. 정읍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선[편집]


성명
최봉선(崔鳳先)
생몰
1881년 ~ 1912년 4월 15일
출생지
전라북도 고부군 성포면 침석리
사망지
전주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최봉선은 1881년생이며 전라북도 고부군 성포면 침석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음력 2월 3일 김영백(金永伯)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1909년 음력 9월까지 김영백 의병장의 지휘에 따라 수십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남 장성군, 전북 정읍ㆍ흥덕ㆍ고창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음력 4월 10일 김영백의진의 선봉장 김진옥(金珍玉) 등 약 40명과 함께 전북 흥덕군 구수교 노상에서 한인 인부 20명이 정읍군 읍내 박 모의 벼 20석을 운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한인 부재지주의 벼 20석을 빼앗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전북 고창군과 고부군을 연결하는 전신주 3개 및 전선을 절단하였다.

1909년 9월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같은 해 12월 12일 고부헌병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910년 2월 18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이른바 기물훼기(器物毁棄), 폭동 및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2년 4월 15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최봉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마산합포구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선[편집]


성명
최봉선(崔鳳善)
이명
최봉선(崔鳳仙)
생몰
1904년 8월 10일 ~ 1996년 3월 8일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부 상남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봉선은 1904년 8월 10일 경상남도 창원부 상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19년 3월 마산에 있는 의신학교(義信學校)에 재학중 김남준(金南俊)·이수학(李秀學)·안음전(安音全)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궐기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 등을 만들었는데, 이때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그 일을 주도했다. 이후 3월 21일 신학교, 창신학교 학생들과 장터에 모인 군중까지 3,000여명을 헤아리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대대적인 학생중심의 시위를 벌였다.

또한 1927년 3월에는 통영군 통영면에 거주하는 친일파이자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이 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지 않으며 조선어로 통역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매국적 발언을 한데 분개하여 시민대회를 열 때 이에 참가하고 시민공동절교에 동참하였으며, '김기정은 일체의 공직을 파직하라'는 시민의 요구를 김기정이 도리어 고소함으로써 박봉삼·황덕윤·황봉석(黃奉石)등과 함께 통영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후 석방된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다시 3월 12일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경찰서로 몰려가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김기정의 집으로 가서 고소 취하를 요구하였으나 김기정이 반성의 기미가 없음을 알고 15일 격문을 만들어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김기정의 집을 습격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나 1년 8개월간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조용히 지내다 1996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최봉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6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