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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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해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
2. 구례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
3. 충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


1. 남해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편집]


파일:최봉기2.jpg
성명
최봉기(崔鳳基)
본관
경주 최씨
생몰
1903년 8월 12일 ~ 1980년 9월 28일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1]
사망지
경상남도 남해군
추서
건국포장

최봉기는 1903년 8월 12일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3년 5월 경남 남해에서 한인식(韓麟植)·박태권(朴泰權)·박종환(朴鍾丸)·유한주(柳漢柱) 등과 함께 남해공산주의자전위동맹(南海共産主義者前衛同盟)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재건과 농민 계층의 계몽 및 권익 옹호를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7월 27일에는 ‘제5회 국제반전데이에 즈음하여 노동자, 농민, 근로하는 형제 제군에 격한다’는 제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무산계급에 대한 착취와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격문 30여 매를 인쇄·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남해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최봉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2. 구례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편집]


성명
최봉기(崔鳳基)
생몰
1910년 5월 26일 ~ 1977년 5월 25일
출생지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광평리
사망지
전라남도 구례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포장

최봉기는 1910년 5월 26일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광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9년경 광주농업학교 3학년생으로서 독서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11월 12일에 동조시위를 계획하고 동교생 00여명과 함께 교실을 뛰쳐나와 구속학생의 석방과 일제 타도를 외치며 광주형무소로 시위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30년 10월 18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금고(禁錮) 4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구례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7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최봉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충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봉기[편집]


파일:최봉기1.jpg
성명
최봉기(崔琫基)
생몰
1894년 4월 1일 ~ 1975년 8월 4일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군 살미면 설운리
사망지
충청북도 충주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대통령표창

최봉기는 1894년 4월 1일 충청북도 충주군 살미면 설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0월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동지규합과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10월 경북 문경읍 신분면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건'이라는 운동비 출자권유서를 만들어 복사지로 2통, 묵필(墨筆)로 1통을 작성하여 시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이후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고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충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8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최봉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금경·최용덕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