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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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복현.jpg
성명
최복현(崔福鉉)
이명
최웅한(崔雄漢)
생몰
1906년 7월 14일 ~ 1979년 10월 31일
출생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망탕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21호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복현은 1906년 7월 14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망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귀국한 그는 정주 오산학교에 재직했고, 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1939년, 그는 지리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임진왜란의 역사, 이순신 장군의 승전담, 백두산정계비 내용들을 강의하여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의 패망을 비밀히 교육하였다.

1940년, 최복현은 재학생 5명을 모아 <5인독서회>를 조직하고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 정보를 수집해 교환하면서 항일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을 위해 정진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1941년 8월 22일에 발각되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42년 9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3년 1월 출옥 후 만주 봉천의 만주방적주식회사에 취지갛여 교육 부문에 종사했으며, 8.15 광복 후 전남 순천중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수, 중앙고등학교 교장,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61년 9월 21일 중앙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후 7년간 교장직을 역임하면서 모교의 중흥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1963년 1월에 발간한 ‘계우(桂友)’ 37호에 실린 ‘강인한 중앙정신 앙양’이란 글의 서두에서 “중앙을 어떻게 하면 과거의 중앙으로 재건할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이것은 당면한 중앙의 과제(課題)”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현재의 중앙은 과거와는 달리 2류 학교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하면서 “다시 1류로 복귀하는 것이 중앙의 과제”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중앙재건(中央再建) 6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전력을 다해 추진해 쇠락해가던 학교를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

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79년 10월 31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2014년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21호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