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청 야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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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13년부터 1978년까지 존속했던 야구단이다.
2. 상세[편집]
일본인 오지마(大島勝太郞)가 쓰고 당시 철도도서관 주사(主事)인 임정일씨가 서문을 작성한 《조선 야구사》에 따르면 최초 창단은 1913년 봄에 이뤄 졌으며 그다음해인 1914년에 조선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부서별로 야구단이 있어서 철도 구장에서 부서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고 기록되어있다. 해방 이전 철도 야구단은 조선 야구단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였으며 평양에도 철도야구단이 있었다고 한다.[1]
해방 후 1946년에 철도국이던 시기에 실업야구단으로 창단했고 1960년대 실업야구연맹의 발족 후 철도청으로 재창단했다. 1977년 철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78년 자회사인 홍익회로 구단을 이관했으나 그 해 해체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의 성적은 저조했다. 해체하기 전 3시즌 연속 승률이 3할을 못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굴지의 재벌인 롯데, 포철이 새로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학생야구 유망주들을 싹쓸이한데다가, 홍익회는 당시 실업 야구단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수들의 신분이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고 한다. 승리 수당은 당연히 없었고.
3. 여담[편집]
- 한국 야구사 최초의 언더핸드 투수인 남궁택경[2] 이 이곳에서 에이스로 활약.
- 삼미-청보(1983~85)와 롯데(1990)감독을 역임한 김진영은 김경기 부친으로 철도국 야구단 1960~63년, 1963~64년 철도청이 교통부 외청이 되면서 철도청 야구단으로 뜀.
- OB내야수 유지훤은 대광고 졸업 후 1975~76년 철도청에서 뜀.
- KBO 최초의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OB 투수 황태환은 철도고 졸업 후 1973년 철도청 야구단 입단 후 육군 경리단 제대 후 1976년 철도청 복귀 후 1977년 한양대 진학.
- 금광옥은 동산고 졸업 후 1975~76년 철도청에서 뜀.
- 임호균은 인천고 졸업 후 1975년 철도청에서 뛰다 1976년 부산 동아대로 진학.
- 1975년 유지훤, 금광옥, 임호균 1976년 유지훤, 금광옥, 황태환 뜀.
- 1982년 원년 개막전 구심으로 유명한 김광철은 성남고 졸업 후 1966~70년 철도청에서 뛴 후 육군 경리단 제대 후 철도청 복귀 후 1972~73년까지 우익수로 활약.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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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후 야구는 "자본주의"스포츠라며 강제 해산됐다고 한다.[2] 남궁택경의 조카 남궁성우도 홍익회 야구단에서 뛰었으며 남궁성우의 아들 남궁훈(개명 전 남궁지훈)도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스카우트가 됐다. 남궁훈과 덕수정보고 동기 투수가 류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