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정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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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역사



1. 개요[편집]


라틴어: tribunus militum consulari potestate(집정관 권한을 가진 트리부누스 밀리툼)
영어: Consular tribune(집정 무관)

로마 공화국 초기인 기원전 444년에서 367년 사이에 집정관과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로마군을 통솔한 행정관.


2. 기원[편집]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집정관 등 고위 행정관을 독점하던 파트리키를 상대로 성산 사건을 잇따라 벌이며 대립하던 플레브스들은 파트리키만으로 구성된 집정관 2명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특히 기원전 450년 12표법을 제정하기 위해 임시로 결성되었던 10인 위원회(decemviri)가 해산을 거부하고 전제 정치를 하려 했다가 플레브스들의 거센 반발에 버티지 못하고 해산된 후, 플레브스의 대표를 자처한 호민관들은 향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정관과 유사한 권한을 갖춘 호민관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집정관의 위신이 실추된다며 거부했지만, 평민들의 강한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444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의 권한을 가진 호민관'을 선출했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이 조치는 기원전 390년 로마 시가 브렌누스가 이끄는 세노네스족에게 약탈당한 뒤에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고대 기록들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기원전 444년부터 기원전 401년까지 43년간 플레브스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이후에도 '집정관과 유사한 권한을 갖춘 호민관'에 뽑혔다는 이들 중 플레브스는 소수였다. 학자들은 집정관 2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 체제에 익숙했던 리비우스와 디오니시오스가 과거 로마에서 어느 순간부터 집정관 대신 무관들이 대거 등장한 이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대립으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본다.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5세기에 라티움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며 주변의 부족 및 도시 국가들을 하나둘씩 제압했지만, 주변국들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집정관 2명만으로는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일례로 기원전 458년 로마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퀴족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출진한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에스퀼리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알반 언덕에서 아이퀴족에게 포위당했을 때, 또다른 집정관인 가이우스 네우티우스 루틸루스는 아이퀴족이 탈환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 투스쿨룸에 보내졌기 때문에 동료 집정관을 제때에 구할 수 없었다. 원로원은 급히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독재관으로 선출했고, 킨킨나투스는 로마에 남아있던 장정들을 대거 징집한 뒤 알반 언덕으로 달려가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임시방편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고,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의 수를 대폭 늘려야 했다. 집정 무관은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역사[편집]


집정 무관은 트리부누스 밀리툼 중 몇 사람이 백부장에 의해 선출되어 집정관처럼 1년의 임기가 주어졌다. 그들은 군대를 독자적으로 통솔하는 것 외에도 합의하에 독재관을 지명하고 후임자 선출을 위한 선거를 관장할 수 있었으며, 모종의 사유로 선거를 실시할 수 없거나 연기해야 하는 경우 그들 중 한 명이 대리 통치했다. 또한 그들은 원로원을 소집하고 원로원 의원들의 자격을 검증하고 이에 미달하는 이들을 추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집정관과는 달리 내정을 다스릴 권한(potestas, 포테스타스)이 없었으며, 집정관을 맡은 이에게 주어지는 장신구를 달 수 없었고, 개선식을 거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은 집정관이 유명무실해진 후기에 흐지부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444년 3명의 집정 무관이 처음으로 선출되었지만 곧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와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사임했다고 한다. 기원전 438년 집정 무관 3명이 다시 선출되었고, 기원전 426년부터는 4명의 집정 무관이 선출되다가 기원전 405년부터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기원전 380년과 기원전 376년에 각각 9명과 4명이 선출된 것을 제외하고, 6명의 집정 무관이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00년에 처음으로 플레브스 출신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에스퀼리누스( Publius Licinius Calvus Esquilinus)가 집정 무관에 선출되었으나, 이후에도 대부분의 집정 무관은 파트리키 출신이었다.

이렇듯 집정 무관이 잇따라 선출되면서, 집정관은 점차 뒷전으로 밀려났다. 집정 무관이 완전히 자리잡은 기원전 408년 이래 집정관은 기원전 393년과 기원전 392년에만 선출되었고, 기원전 392년에서 기원전 367년 사이에 집정관 선거가 열리지 않았다. 이는 당시 로마인들이 집정관이 굳이 존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던 기원전 368년, 로마는 벨레트레이 전쟁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 전반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에 로마는 국민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카밀루스를 독재관에 임명했다. 이때 호민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플레브스 계급에서 선출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파트리키가 집정 무관을 대부분 차지하는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차라리 집정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그 중 한 자리를 보장받겠다는 평민들의 의사였다.

카밀루스는 내심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민회가 이러한 법안을 승인하기 위해 모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놨다. 이에 분노한 민회 구성원들은 카밀루스가 독재관에서 물려났을 때 탄핵하려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켈트족이 벨리트레이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라티움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로마인들은 기원전 367년에 카밀루스를 다섯 번째로 독재관에 임명해 켈트족을 막게 했고, 카밀루스는 켈트족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정관 1명을 평민 계급에서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카밀루스에게 의존했다. 평민 지도자들은 이에 맞서 카밀루스를 체포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밀루스는 원로원을 소집해 언제까지 평민들과 마찰을 빚는다면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했다. 그 대신, 그는 귀족만이 재임할 수 있는 법무관을 설립하여 귀족의 권리를 보호하게 하자고 제안했으며 원로원은 이를 승낙했다. 이리하여 집정관이 부활하고 법무관이 신설된 뒤 집정 무관은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가 라티움의 패권을 확고히 하였으니 이전처럼 많은 지휘관을 둘 필요가 없게 되자 집정 무관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이후 6명의 집정 무관은 집정관보다 낮은 권한의 임페리움을 가진 법무관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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