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민스터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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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존 민스터워스
John Minsterworth
생몰년도
미상 ~ 1377년 4월 12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민스터워스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타이번
직위
기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 그러나 퐁발랭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 왕국에 망명한 뒤 프랑스-카스티야 연합 함대를 결성해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가 도중에 체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처형되었다.


2. 생애[편집]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지만, 글로스터셔주의 민스터워스 출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처형을 결정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잉글랜드 남서부에 토지 30에이커, 초원 5개를 소유했고, 글로스터셔의 레너드 스탠리 교구에서 수수료를 받고 코로디[1]를 실시했으며, 글로스터 시내의 여러 저택을 보유했고, 남 웨일스와 노퍽 등지에서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그는 잉글랜드 왕국 내에서 상당한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367년 프랑스에서 복무하기 위해 제7대 해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기사 계약을 맺었으며, 1368년 프랑스 원정대에 합류하기로 계약했다. 6,000명에 달하는 원정군은 1370년 7월 윈첼시 항에 집결했다. 원정군 총사령관은 백년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로버트 놀스가 맡았으며, 그는 휴 칼블리, 토머스 그랜디슨, 월터 피츠월터와 함께 부대 지휘관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기사 10명, 맨앳암즈 200명, 궁수병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당대 연대기들에 따르면, 그는 놀스가 사회적 지위가 비천한 인간이자 약탈자, 도굴꾼이라며, 그가 상관이 된 것에 노골적으로 반발했다고 한다.

원정군은 1370년 9월 칼레에 상륙한 뒤 솜 일대를 진군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랭스 시 외곽에서 무력행진을 벌였고, 뒤이어 트루아를 위협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느무르에서 파리로 접근하면서 많은 마을을 점령하고 몸값 지불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파괴했다. 9월 24일 파리에 도착했지만 수비가 매우 견고해 공략이 불가능하자 파리 주변의 수많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해 수비대가 격분하여 요새 바깥으로 나오게 해 회전을 벌이려 했으나, 수비대가 이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결국 파리 공략을 포기한 놀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루아르 강변의 여러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고 푸아투나 노르망디 남부로 진군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아키텐에서 북상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리모주 공방전을 치른 뒤 보르도로 돌아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10월 2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얼마 후 장 4세 드 모켄시 휘하의 브르타뉴 분견대와 합세해 4,000명을 확보했으며, 뒤이어 샤텔로에 집결한 루이 드 상세르 휘하 1,200명과 합류했다. 12월 1일 캉을 출발한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이르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건설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13주분만 지급했기 때문에,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매우 컸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와 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12월 4일, 게클랭은 토머스 그랜디슨의 부대를 퐁발랭에서 기습 공격해 궤멸시켰다. 뒤이어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마저 궤멸시켰다. 그 후 게클랭은 적군이 약탈 행진 동안 점령했던 모든 마을과 성들을 탈환한 뒤 놀스와 민스터워스의 영국군을 추격했다. 놀스와 민스터워스는 곧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대다수 병력을 잃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로버트 놀스와 존 민스터워스는 심한 비난에 시달렸다. 민스터워스는 패전의 책임을 놀스에게 떠넘기려 했고, 귀족들은 같은 영주인 민스터워스보다는 일개 기사인 놀스 쪽이 책임을 떠넘기기 쉽다고 여기고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놀스를 개인적으로 아꼈던 흑태자 에드워드곤트의 존이 놀스를 옹호했고, 에드워드 3세는 민스터워스가 놀스의 명령에 불복종했으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의회에 출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민스터워스는 자신이 처벌받을 것임을 직감하고 이를 따르지 않고 1372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1377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웨일스 공작위 요구자 오와인 로고크를 대동한 프랑스-카스티야 연합 함대를 일으켜 웨일스 해안에 상륙해서 잉글랜드에게 타격을 입힐 계획을 세웠다. 민스터워스는 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병력, 물자, 수송선 파견을 협의하기 위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직접 떠났다. 그러나 1377년 3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가스코뉴의 세네샬인 토머스 펠턴에게 체포된 뒤 보르도로 이송되었고, 이후 브리스톨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런던 탑으로 옮겨졌다. 그 후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은 그는 이듬해 5월에 갤리선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으며, 자신과 오와인 로고크가 침공을 주도할 예정이었다고 자백했다.

결국 런던 시의 길드홀에서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와 다른 왕실 판사들이 주관한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377년 4월 12일 미들섹스 타이번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그의 유해는 4등분 되어 한 부분은 남부 웨일스의 행정 중심지이며 오와인 로고크의 추종자들이 많았던 카마던으로 보내졌고, 다른 한 부분은 그의 영지 중앙에 위치한 브리스톨로 보내졌으며, 나머지는 도버와 뉴캐슬로 보내졌다. 민스터워스의 두개골은 런던 브리지 위에 전시되었고, 그의 재산 중 글로스터셔의 재산은 곤트의 존에게 귀속되었으며, 웨일스와 레너드 스탠리 교구의 영지는 에드워드 3세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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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rrody, 수도원에서 빈민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무료로 제공하는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