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남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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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남작 전쟁
영어: First Barons' War
파일:800px-John_of_England_vs_Louis_VIII_of_France.jpg
기간
서기 1215년 ~ 1217년
장소
잉글랜드
원인
존 왕마그나 카르타 조인 거부.
교전국 및 교전세력
존 왕마그나 카르타 조인 거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신성교회군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왕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리처드 피츠로이
파일:800px-Blason_Guillaume_le_Maréchal.svg.png 윌리엄 마셜
파일:800px-Hugh_de_Burgh.svg.png 휴버트 디 버그
파일:Philip_d'Aubigny_Coat_of_arms.svg.png 필립 드비니
파일:800px-Longespee.svg.png 윌리엄 롱제스페
파일:800px-Arms_of_William_de_Ferrers,_5th_Earl_of_Derby_(d.1254).svg.png 윌리엄 드 페러스
캐싱엄의 윌리엄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로버트 피츠왈터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루이 8세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헨리 드 보훈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
파일:800px-Blason_ville_fr_Chambellay_(Maine-et-Loire).svg.png 토머스†
파일:House_of_Courtenay.svg.png 코트니의 로버트
수도사 유스타스☠
결과
잉글랜드 앙주 가문의 승리
램버스 조약 체결
마그나 카르타 복구
1. 개요
2. 배경
3. 전개



1. 개요[편집]


부빈 전투의 패전으로 브르타뉴노르망디의 지배권이 결정적으로 카페 왕조에게 넘어가자, 존 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들이 일으킨 내전이다. 이때 잉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루이 왕자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했고[1], 이에 응한 루이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면서 앙주 제국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사실 본 문서의 이름인 남작 전쟁은 옳은 표현은 아니다. 남작들만 전쟁에 참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 이는 영어명인 Barons' War를 그대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 건데 애초에 'Baron'이라는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문맥에 따라서 단순히 하위귀족으로서의 '남작'이 아니라 '(군주의 직속) 봉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남작 외에도 공작이든 백작이든 왕의 봉신을 모두 의미한다. 즉 그냥 귀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제2차 남작 전쟁도 동일하다.[2]


2. 배경[편집]


잉글랜드는 존 왕의 치세에 이르러 아키텐과 노르망디 등, 가스코뉴를 제외한 잉글랜드령 프랑스 영토를 필리프 2세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신성 로마 제국오토 4세와 함께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던 존은 부빈 전투에서 패퇴했고, 존 왕의 지배에 진절머리가 난 잉글랜드 귀족들은 마그나 카르타의 체결을 요구한다. 귀족들의 압력에 못이긴 존은 마지못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은 했으나 추인하지 않았고, 결국 남작들을 주축으로 한 귀족들은 존 왕을 폐위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3. 전개[편집]


남작군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피츠왈터는 스스로를 신성교회군 원수라 칭하고 프랑스의 루이에게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을 요구한다. 루이는 이러한 남작들의 지원하에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인 런던에 입성했고, 남작군과 런던 시민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존 왕은 도주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까지 받은 루이는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등 주요 잉글랜드 도시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존 왕을 추격했다.

이때 루이의 아버지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루이가 가장 먼저 점령했어야 할 도버 성을 간과한 것에 우려를 표했다. 켄트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1/3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존 왕을 따르는 휴버트 디 버그가 도버 성에서 루이의 배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는 뒤늦게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3개월 간의 포위 공격에도 도버 성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장궁병 부대에게 켄트 일대가 습격을 받게 되자 결국 10월 14일에 휴전 조약을 맺은 루이의 프랑스군은 런던으로 회군했고, 또한 루이의 프랑스군이 런던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로체스터 성은 식량난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은 이질에 걸려 급사한다. 존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윌리엄 마셜이 섭정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작들은 윌리엄 마셜의 회유로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끌어들인 루이를 배신했고, 루이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윈 첼시로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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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왕루이 8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처숙부였기 때문이다.[2] 가령 제2차 남작 전쟁을 주도한 시몽 드 몽포르는 레스터의 '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