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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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태화.jpg
출생
1870년 5월 13일
전라도 보성군 겸어면 도림리
(현재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도림마을)[1]#
사망
1954년 1월 28일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
본관
하동 정씨
족보명
정재화(鄭在化)

백암(白巖)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태화는 1870년 5월 13일 전라도 보성군 겸어면 도림리(현재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도림마을)의 중농 가정에서 부친 정환종(鄭煥琮)과 모친 선갈음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활동을 했던 정길(鄭佶)의 10대손으로, 김가곡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슬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향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는 1907년경 일본군 특수부대에서 백야면 입석동(현 겸백면 석호리 선돌마을)의 '쏫모랭이'와 '다라개미'의 험준한 산비탈에 인도 확보를 위한 공사를 하면서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였는데, 이때 주민들의 인격을 모독하자 분노하여 일본군 감독관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감독관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분노하여 그를 쳐 죽이고 현장을 탈출했다. 이에 일본군은 정태화의 집에 들이닥쳐 부모와 부인을 끌어내 정태화를 내놓으라며 폭행을 가했다.

정태화는 이후 은신하다가 사돈인 안규홍을 찾아갔다. 이후 1908년 안규홍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따랐으며, 훈련대장과 행군장을 맡으면서 신분을 위장하고 보성, 순천, 화순 등 전라남도 일대와 전북 임실 지역 일대에서 항일투쟁의 전투를 수없이 전개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부친 정환종도 의병들을 위해 식량과 소 등을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군은 정태화 일가족을 '폭도를 지원한 역적'으로 간주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부친 정환종은 감나무에 결박되어 고문받다가 현장에서 사망했고, 아내 김가곡, 모친 선갈음 역시 고문을 받은 뒤 장독으로 사망했다. 아직 어린 정태화의 자식들은 떠이웃에 의탁했으나, 일본군이 도움을 주는 이웃마저도 끊임없이 괴롭히자 결국 마을에서 쫓겨났고,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정태화는 일가족이 풍비박산나는 와중에도 안규홍과 함께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1909년경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09년 10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탈옥을 결심하고 하 의병들의 도움을 받아 안규홍 대장과의 접선을 시도했으며, 구금중인 의병 일행들과 동반 탈옥을 도모했다. 그러나 접선이 이뤄지지 않자 단독 탈옥을 감행했다.

탈옥 후 정태화(鄭太化), 정재화(鄭在化, 鄭在和) 등의 가명을 사용하면서 숨어지낸 그의 20년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30년경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 산간 오지에 정착한 그는 재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 중 둘째 아들 정수현은 6.25 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에 배속되어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1951년 10월 16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1954년 1월 28일, 정태화는 득량면 마천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정태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3년 정태화의 행적을 다룬 <백암실기>가 발간되었다.#
[1]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 정양석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