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민

덤프버전 :


대한민국의 축구인

이름
정광민
丁光珉 | JUNG KUANG-MIN
출생
1976년 1월 8일 (48세)
서울특별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82cm
학력
대림초 - 남서울중 - 서울기계공고 - 명지대
포지션
공격수
소속팀
안양 LG 치타스 (1998~2002)
FC 서울 (2007)
대구 FC (2007)
국가대표
1경기 / 0골 (대한민국 / 1999~2001)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1. 개요[편집]


정광민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지도자이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서울대림초등학교시절부터 남서울중-서울기계공고까지 안정환과 동기 동창이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내내 안정환에 이어 2인자로 활약했고, 아주대 진학을 앞뒀지만 안정환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명지대로 진학한다.

이후 1998 K-리그 드래프트에서 안양 LG 치타스우선지명을 받고 프로 선수가 됐다. 등번호 23번을 달았다.

신인시절 안정환을 비롯해, 이동국, 백승철, 박성배 등 쟁쟁한 신인 사이에서 필립모리스컵에서 4골을 득점하며 두각을 보였다. 결국 리그에선 안정환보다 많은 6골을 기록하며 경쟁력을 입증했고, 빅토르와 함께 팀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했다.

2년차인 1999년에도 8득점 7도움을 기록하며 최용수와 함께 팀 공격을 이끌었다.

2000년에는 최용수와 함께 리그 득점 2위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고, 안양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 매경기 결승골을 넣어 승리의 파랑새로 불렸다. 백지훈?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히딩크호 초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름을 받아 칼스버그컵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2001년과 2002년 심각한 부진에 빠졌고, 2003 시즌을 앞두고 음주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다가 축구계를 떠나버렸다.

이후 현역 육군으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뒤 2007년 FC 서울로 팀명을 변경한 친정 팀에 합류하며 축구계로 복귀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세뇰 귀네슈 감독은 유망주를 선호했고, 기회를 받은 전반기에서 8경기 동안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며 반년 만에 팀을 떠났다.

2007년 7월 31일 대구 FC로 이적했지만, 두 경기 출전에 그쳤다. 시즌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2015년 4월 경기대학교 축구부 감독직을 맡아 교체 멤버가 없는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2016 추계대학연맹전, 2018 경기도 꿈나무 축구대회 대학부 등 두 번의 대회 준우승을 거두며 선전했다.

2019년, 최용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친정 팀인 FC 서울의 코치로 합류했다.

2024년 K4리그에 신규 참가하는 남양주시민축구단 코친소 선임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06:43:18에 나무위키 정광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