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로

덤프버전 : r20210301

파일:장덕로.jpg
성명
장덕로(張德櫓)
이명
장덕로(張德魯)

성산(聖山)
본관
안동 장씨
생몰
1884년 1월 13일[1] ~ ?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용산동[2]#
본적
평안북도 신의주시 앙초동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장덕로는 1884년 1월 13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용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뒤에 신의주시 앙초동에 본적을 두었다. 그는 1900년 장하순(張河舜)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1년 자신의 집에 용산교회(龍山敎會)를 설립했다. 1911년 마전교회(麻田敎會)를 건설하고 마전교회 부설 신명학교(新明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1912년에는 윤치호, 김규식, 현순, 임종순(林鍾純) 등과 함께 한국주일학교협회를 조직하기 위한 주일학당위원회에 참여해 서기를 맡았다.

1913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 신의주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당국의 수사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그해 5월 23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이 파리로 갈 때에 한국민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다는 요지의 진술서를 작성해 국제연맹과 만국장로교연합회 등에 발송하는데 참여하고 진술서에 서명했다.

1920년 2월 중국 상하이의 플아스조계 하비로(霞飛路) 팔선교(八仙橋)에 소재한 기독교 청소년회관에서 열린 흥사단 대회에 참가했으며, 1920년 초 임시정부의 남만주 안동 지역 교통사무국원으로 파견되어 송병조와 함께 전단 배부,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으며,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해 기관지의 편집부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 8월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제3회 총회에서 간사로 피산되어 외교후원회 주간지인 〈선전(宣傳)〉의 기자로 활동했다.

1924년 3월 3일 안창호와 함께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고 한인 자제들의 지식과 애국사상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1931년 3월 안창호 등과 함께 공평사(公平社)를 설립하여 근대적인 협동조합을 운영하였으며 이를 통해 구급의무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상하이에서 흥사단 원동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원동반 제2반장에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대회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특무대장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1935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뽑혀 김규식, 윤기섭 등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동했다. 아울러 1928년부터 상하이 고려인기독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와 함께 가면서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자금 마련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그는 귀국 후 1949년에 옥인동교회를 창설하고 목사로 부임했지만 6.25 전쟁 중 납북되었고 이후 그가 어찌 되었으며, 언제, 어느 곳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장덕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34년 발행된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886년 3월 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안동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성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