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드 브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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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 드 브로세.jpg
이름
장 드 브로세
Jean de Brosse

출생
1375년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후리엘 성
사망
1433년
프랑스 왕국 누벨아키텐 부삭 성
아버지
피에르 드 브로세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말발
배우자
잔 드 네일락
자녀
장 드 브로세, 마르그리트, 블랑슈
직위
부삭 영주, 프랑스 원수.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귀족, 장군. 일명 '부삭 원수'.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편집]


1375년경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후리엘 성에서 부삭 영주 피에르 드 브로세와 라 포레의 여주인인 마르그리트 드 말발의 아들로 출생했다. 1419년경 1396년부터 1421년까지 로도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맡았던 필리베르 드 네일락의 조카인 잔 드 네일락과 결혼했다. 1423년 3월 31일, 상세르 백작 베로 3세 드 클레르몽상세르의 명령에 따라 무장병 100명을 소집해 복무했으며, 뒤이어 브르타뉴 공자이며 프랑스 무관장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휘하에 복무했다. 1426년 7월 14일, 도팽 샤를은 그의 충성스럽고 훌륭한 봉사에 보답하고자 프랑스 원수로 승격했다.

1427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일개 종자였던 장 베르네가 도팽 샤를의 총애를 받아 기병대의 그랜드마스터에 이어 푸아티에의 대장으로 승격하고 도팽 주위에 자신의 부하들을 배치해 정국을 좌지우지 하는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해 6월 27일, 리슈몽의 지시를 받은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말을 타고 클레인 강둑을 따라 가고 있던 베러네를 십격해 살해한 뒤 시신을 강에 던졌다. 도팽 샤를은 이에 격노했지만,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과 힘겹게 싸우는 상황에서 리슈몽과 갈등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깨닫고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1428년, 브로세는 도팽 샤를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된 뒤 부르주 성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용맹한 장교를 썩힐 수는 없다고 보고, 그와 곧 화해하고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시켰다. 1429년 2월,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들이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등을 싣고 오를레앙 공방전을 벌이는 아군에 전달하러 파리에서 출발했다. 이 소식을 접한 클레르몽 백작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존 스튜어트 드 단리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이 이들을 요격하러 진군했고, 그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러나 뒤이은 루브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처남인 장 드 네일락이 전사했다.

이후 오를레앙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은 잔 다르크의 부관으로 발탁되었고, 잔의 지휘 아래 용맹을 떨쳤다. 그 결과 잉글랜드군은 1429년 5월 8일에 오를레앙에서 철수했다. 브로세는 뒤이은 루아르 원정파테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공헌했고, 랭스 행진에도 참여했다.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한 성유를 운반하는 영예를 누렸다. 1429년 8월 26일 ~ 9월 13일 1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파리 공략에 실패했다. 1430년 초 센 강 북부의 중장으로 선임되었다.

1430년 5월 24일, 잔 다르크가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생포되었다. 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샤를 7세에게 잔을 어떻게든 구출해야 한다며 자신에게 구출 작전을 맡겨 달라고 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후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4,000 병력을 이끌고 콩피에뉴로 달려가서 부르고뉴군을 몰아냈지만, 잔은 이미 루앙으로 끌려갔다. 1431년 5월 30일 잔이 루앙에서 화형당하자, 브로세는 잔의 원수를 갚고자 1432년까지 루앙 공략전에 착수했다.

1432년 2월 3일, 600명의 습격대를 이끌고 루앙 성을 기습해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리품의 특권을 놓고 다른 장수들과 논쟁을 벌이느라 성을 지키는 데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잉글랜드군이 반격하는 바람에 10일 만에 성채를 잃었고, 그는 일부 병사와 함께 겨우 도주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했고 105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 포위된 라니쉬르마른 요새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브로세는 군대를 이끌면서 왕실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사비를 털어가며 군자금을 모아야 했다. 1427년 1,000크로네를 받는 조건으로 부삭의 부르주아 50인에게 세금을 걷지 않기로 했는데, 이로 인해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생애 내내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더, 1433년 부삭 성에서 사망한 뒤, 채권자들은 끝내 빚을 갚지 않고 죽어버린 그에게 원한을 품고 그가 묻힌 프레브누아 수도원에서 그의 유해를 파헤쳐서 더러운 곳에 던지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저지로 실패했다.

이후 샤를 7세는 그가 자신을 위해 봉사하느라 막대한 빚에 시달린 점을 고려해 그의 유해가 프레브누아 수도원에 안치되도록 보장했고, 부삭, 후리엘 및 생트 세베르 일대를 다스리는 그의 후손들이 예외적인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장 드 브로세의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드 말발과 장 드 브로세의 사촌이며 브로세의 자식들의 보호자로 지명된 루이 드 쿨랑이 이 특별한 권리를 얻기 위해 치열한 법정 공방전을 벌였고, 루이 드 쿨랑이 무력을 동원한 끝에 쟁취했다.


3. 가족[편집]


  • 잔 드 네일락(? ~ 1419)
    • 장 2세 드 브로세(1423 ~ 1482): 부삭 영주. 1437년 니모주 자작이자 팡티에브르 여백작인 니콜 드 샤티용과 결혼하면서 팡티에브르 백작을 칭했다.
    • 마르그리트: 엔빌의 영주인 제르맹 드 비본의 부인.
    • 블랑슈: 뮈레와 부낭시의 영주인 장 4세 드 로예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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