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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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잔 가스토네
Gian Gastone de' Medici, Granduca di Toscana


파일:Gian_Gastone_de'_Medici.jpg

출생
1671년 5월 24일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사망
1737년 7월 9일 (향년 66세)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재위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1723년 10월 31일 ~ 1737년 7월 9일
배우자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 (1697년 결혼)
아버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
어머니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형제
페르디난도, 안나 마리아 루이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토스카나 대공국대공. 메디치 가문 출신의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이다. 그의 사후 토스카나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2. 생애[편집]


1671년 5월 24일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와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외할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에게서 따와 잔 가스토네라고 이름지어졌다. 어머니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잔 가스토네가 4살 때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차남이라 관심을 못 받으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고 다정했으나, 우울한 성격에 모든 걸 귀찮아했다고 한다.

후계자를 공고히 하고 싶어했던 코시모 3세는 장남 페르디난도가 자식을 가지지 못하자 잔 가스토네를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와 결혼시켰다. 노이부르크 궁정백의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사별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었기에 생식 능력이 보장되어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였던 잔 가스토네는 아내를 싫어했고,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는 종종 동성애인이자 시종인 줄리아노 다미를 데리고 유럽의 대도시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잔 가스토네는 도박과 술, 동성애를 즐기며 문란한 생활을 했다. 1713년 10월 31일에 후계자 페르디난도가 사망하자 방탕한 차남에게 대공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코시모 3세는 총명한 딸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의 반대로 잔 가스토네를 후계자로 지명해야 했다. 잔 가스토네는 대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에 후계자가 되자 엉뚱하게도 누나를 탓했다. 그리고 히키코모리와 비슷한 생활을 하며 술독에 빠져지냈다.

1723년에 아버지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숨을 거두면서 잔 가스토네는 쉰이 넘은 나이에 대공이 되었다.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은 경제가 무너지고 국고가 바닥나 쇠락하고 있는 상태였다. 잔 가스토네는 아버지가 만든 부당한 법령을 없애고 세금을 줄였으며, 부랑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는 등 사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몰락하고 있는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무력해진 잔 가스토네는 죽은 형의 아내에게 정치를 맡기고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유일하게 그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시종 줄리아노 다미였다. 다미는 대공을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해 남창을 데려와서 바쳤다. 잔 가스토네는 남창들과 정사를 즐기며 자주 문란한 연회를 열었다. 이 남창들은 대공을 즐겁게 해줄 때마다 대공이 던진 루스피라는 동전을 받았기에 여기서 이름을 따와 루스판티라고 불렸다. 루스판티들은 대공의 뒷배를 믿고 민가를 습격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1731년 경부터 대공의 건강은 크게 안 좋아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때를 놓치지 않고 토스카나 대공국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고 그 결과 빈 조약이 체결되면서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 토스카나 대공국의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1737년 잔 가스토네가 사망하자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피렌체를 점령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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