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성/도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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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의 거대한 도루이.

((るい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분류
4.1. 축조 방법
4.2. 기능



1. 개요[편집]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토루(土壘)이다. 일본식 성에서 적이나 동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로 성토(盛土)를 통해 쌓은 구루와(曲輪)의 축대이자 외곽 방벽의 한 가지. 나머지 한 가지는 도루이의 겉을 돌로 두른 이시가키(石垣)이다.


2. 역사[편집]


가장 기본적인 축대의 종류인 도루이는 잠깐잠깐 나타나다 중근세부터 서일본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확산세를 보인 이시가키와는 달리, 선사시대부터 근세까지 일본 열도 전역에서 골고루 나타났다. 환호마을, 야카타(館), 진야(陳屋), 사찰, 성 등 다양한 방어시설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이시가키를 두른 근세의 성들도 외곽인 소가마에(総構え)는 토루로 이루어진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을 정도. 아즈치(安土 ・ 的土, あづち)라고도 한다.

일본의 성은 흔히 야요이(弥生) 시대의 환호집락(環濠集落)에서 출발한다고 하는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해자를 판 바깥에 도루이를 쌓았다고 한다. 이 시대 유적의 대표격인 곳이 요시노가리(吉野ヶ里). 그러나 아스카 시대 이후부터는 해자 안쪽에 도루이를 쌓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아스카 시대에는 규슈다자이후(大宰府) 근방에 조선식 산성이 축조되는데, 그 중 오노 성(大野城) 곁에 펼쳐진 평야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미즈키(水城)가 판축토루의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무사나 영주가 거주하는 야카타(館)가 주로 축조되고, 센고쿠 시대에는 일본 열도 전역에 수없이 많은 토성이 건축되었다. 센고쿠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에는 한반도 동남부 해안에 많은 왜성(倭城)들이 건축되었다. 왜성은 보통 이시가키를 두른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나, 견내량왜성(見乃梁倭城), 망진왜성(望晉倭城)과 같이 처음부터 대부분 도루이로 이루어진 성도 있었으며 순천왜성과 같이 도루이로 된 외곽(外郭)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현재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 있는 여러 왜채(倭寨)들은 도루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가키가 널리 퍼지는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도 도루이는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으며, 특히 동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도루이로 된 성이 많다. '서국(西國)은 이시가키, 동국(東國)은 도루이(土塁)'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동일본에서 이시가키의 재료가 되는 화강암의 산지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토루로 유명한 근세성곽은 우츠노미야 성, 히로사키 성(弘前城) 등이 있다.

3. 구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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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이는 보통 호리(堀)[1]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호리를 파서 나온 흙인 배토(排土, はいど)를 성벽으로서 쌓으면 저절로 도루이가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쌓은 도루이를 가키아게도루이(掻揚土塁, かきあげどるい)라고 한다. 이렇게 도루이를 쌓으면 멀리에서 흙을 운반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으므로 효율적이었다. 도루이 경사면의 기울기는 45° 정도가 보통이다. 이는 각도가 더 완만해져 버리면 적의 공격을 막기가 어려워지고, 더 급해져 버리면 토사가 무너져 내릴 위험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도루이의 윗면을 히라미(褶, ひらみ) 또는 마부미(馬踏, まぶみ)라고 하며, 기단면을 시키(敷, しき), 경사면을 노리(法 ・ 矩, のり)라고 한다. 바깥쪽 경사면을 소토노리(外法), 안쪽 경사면을 우치노리(內法)라고 부른다. 도루이의 높이는 통상 윗면과 기단면 사이의 거리로 치지만, 도루이 바깥에 있는 호리의 깊이를 포함하는 경우에는 해자 바닥에서부터 잰 거리로 높이를 측정한다. 물을 채운 미즈보리(水堀)의 경우는 수면 위로부터 잰 거리가 기준이 된다. 경사면과 윗면이 만나는 꼭짓점을 노리카타(法肩, のりかた), 아랫면과 만나는 꼭짓점을 노리지리(法尻, のりじり) 또는 노리사키(法先, のりさき)라고 부른다[2].

도루이의 윗면에는 실질적인 성벽이자 성가퀴(女牆) 역할을 하는 헤이(塀, へい)나 목책(柵, さく)을 두르는데, 통상적으로 중심선보다 약간 바깥쪽에 설치한다. 이때 설치물 안쪽을 무샤바시리(武者走り, むしゃばしり)[3], 바깥쪽을 이누바시리(犬走り, いぬばしり)[4]라고 한다. 무샤바시리가 이누바시리보다 넓은 이유는, 도루이는 이시가키와는 다르게 직각의 경사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이누바시리가 적병이 다닐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성 안쪽에서 방비를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누바시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었는데, 설치물의 기초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누바시리의 넓이는 1척 5촌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했다고 한다.

도루이의 안쪽 경사면에는 윗면으로 오르기 위해 비탈과 계단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간기(雁木, がんぎ) 또는 사카(坂)라고 한다. 계단이 마주 보도록 하여 V자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이자카(合坂, あいざか), 평행하게 설치한 것을 가사네자카(重ね坂, かさねざか)라고 한다. 많은 병사들이 동시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위해서는 가사네자카를 설치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도루이의 높이가 높을수록 계단의 기울기를 완만하게 하여 병사들이 오르기 쉽게 하였다. 시대가 흐르면 안쪽 경사면 전체를 계단으로 덮어 어디에서나 성벽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왕왕 나타난다.


4. 분류[편집]



4.1. 축조 방법[편집]


  • 판축토루(版築土塁)


판축이란, 판축판(版築版)이라고 하는 나무틀을 만들어 그 안에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이나 기와, 모래, 자갈, 점토 등을 수십 밀리미터 정도의 층에 다져 넣고 지정목(地釘木)을 박은 뒤 방망이 등으로 찧어서 여러 층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오래된 토목 기법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항토(夯土)라고 하는데, 흙을 단순히 쌓아올리는 것과는 달리 일정한 두께로 사질토와 점질토 등을 번갈아 가며 반복해서 쌓으므로 훨씬 견고하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 무렵부터 볼 수 있는 토루의 축조법으로, 판축판을 사용하지 않고 판축과 같은 방법으로 흙을 쌓은 것은 판축상 토루(版築状土塁)라고 한다.


  • 다타키도이(叩き土居, たたきどい)


토사를 두드려 굳히면서 쌓은 도루이. 판축법과는 달리 틀을 쓰지 않고, 대강 흙을 쌓아 두드려 굳힌 것이다. 토사에 점토나 기름을 섞어 강도를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 시바도이(芝土居, しばどい)


잔디를 심은 도루이. 단순히 흙만 두드려 쌓았을 경우 풍화작용에 의하여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축대 전체가 붕괴해 버릴 위험성이 있었으므로, 토사를 잡아주기 위하여 풀을 심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타키도이보다 더 가파른 60°가량의 경사를 조성할 수 있었으며, 쌓는 흙에 잔디를 섞은 뒤 다지는 경우도 있었다. 단순히 잔디뿐만이 아니라 소엽맥문동(小葉麥門冬), 조릿대, 얼룩조릿대, 대나무와 같은 식생도 심었다. 얼룩조릿대는 특히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자주 심었다고 하며, 이러한 도루이를 구마자사도루이(熊笹土塁, くまざさどるい)라고도 한다[5]. 그러나 높이가 낮은 토루에 식생을 심으면 적병이 기어올라올 수 있도록 하는 발받침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심지 않았다고 하고, 심은 곳도 그 길이를 짧게 유지시키기 위하여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경사면을 미끄럽게 하기 위하여 아예 롬(loam) 층을 노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4.2. 기능[편집]


  • 이치몬지도이(一文字土居, いちもんじどい)


성의 구루와(曲輪)로 출입할 수 있는 고구치(虎口)를 보조하는 도루이로, 고구치 안쪽으로 성 내부가 보이지 않게 차단하는 가림막 역할을 한다. 고구치 안에 놓인 것을 시토미도이(蔀土居, しとみどい), 밖에 놓인 것을 가자시도이(茀土居, かざしどい)라고 한다. 이치몬지도이가 발전한 형태가 우마다시(馬出し)이다.


  • 다테도루이(竪土塁, たてどるい)


성이 구릉지 위에 있는 경우, 전투원 보호를 위해 산의 경사를 수직으로 타고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진 도루이가 제한적으로 관찰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노보리도루이(登り土塁)라고도 하며,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와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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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자를 뜻한다. 물을 채웠든 채우지 않았든 구루와 사이를 분리시켜 놓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2] 직관적으로 이해하면 쉽다. 가타(肩)은 어깨, 시리(尻)는 엉덩이라는 뜻이다.[3]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회곽로(回郭路)가 이에 해당한다.[4] 한국어로는 벼랑길에 가까운 용어이다.[5] 구마자사(熊笹)는 얼룩조릿대의 일본어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