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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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기
李勳基 | Lee Hoon-ki


출생
1965년
경기도 인천시 남구
(現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본관
고성 이씨 [1]
신체
187cm
거주지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가족
이철기, 배우자 김미경
학력
인하대학교 사대부고 (졸업)
청주대학교 (생물학 / 학사)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언론·홍보학 / 석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안드레아)
소속 정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현직

경력
인천일보 공채 2기 기자
iTV 경인방송 보도국 정치부 기자
iTV 경인방송 보도국 경제부 기자
iTV 경인방송 보도국 사회부 기자
전국언론노조 희망조합 노조위원장
경인지역 새 방송 창사준비위원회 집행위원
OBS경인TV 보도국 사회팀장
OBS경인TV 보도국 국제팀장
OBS경인TV 정책국장
인천도시공사 이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외협력담당관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4.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대한민국언론인 출신 정치인.


2. 생애[편집]


1965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서 줄곧 인천에서 성장한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조선 중기 관료로서 성균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이조판서를 거쳐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까지 지냈던 정숙공 이칙(李則 / 1438~1496)의 17대손이다.실록에 기록된 이칙 이칙은 관직 말년에 성종 임금으로부터 경기도 김포군 노장면 일대[2]의 땅을 하사 받아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이후부터 현재까지 인천에서 17대에 걸쳐 약 530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또 조부부터 3대가 언론계에 종사한 언론인 집안이다. 조부 이종윤 씨는 1945년 수도권 지역 언론의 효시인 대중일보[3] 창간에 함께한 원년 멤버 중 하나이며, 부친 이벽 씨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대중일보와 경기매일신문에서 26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경기매일신문 편집장이던 1973년 유신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되었다. 이런 가정사 때문에 언론인의 꿈을 갖게 됐고 1991년 인천일보 공채 기자로 입사해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인천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쓴 기사로는 정부가 1994년부터 추진하던 서해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건설 저지를 꼽았다. 당시 정부의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에 대해 줄기차게 현장 취재를 하고 핵폐기장 건설의 부당성을 언급하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해당 기사는 편집국 고위층이 출고를 거부하는 바람에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꾸준히 굴업도 현장 취재를 진행하자 당시 인천일보 편집국장이 "너는 어떻게 된 녀석이 너희 할아버지나 아버지랑 똑같니?"라고 웃으며 얘기했다고 한다. 이후 굴업도 지하에서 대규모 활성단층이 발견되면서 핵폐기장 건설이 백지화됐고 건설 백지화 기념 잔치를 할 때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출입이 거부된 상황에서 홀로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잔치에 참여했다고 한다. 꾸준히 진행된 현장 취재를 굴업도 주민들도 알고 있었고 주민들의 진심을 알아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1997년 캄보디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훈 할머니[4]의 사연이 경상남도 지역지인 경남매일을 통해 전해졌다. 이에 훈 할머니의 가족을 찾기 위해 많은 한국 언론사가 취재를 시작했고 이때 인천일보 특별취재팀 소속으로 캄보디아와 한국을 넘나들며 기사를 써서 할머니의 개인사와 일본군 정신대,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환기시켰으며 영구귀국을 도왔다.[5]

1998년 당시 수도권 유일의 민영방송인 iTV 인천방송으로 이직해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iTV 노조위원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때 방송사를 지렛대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려는 대주주 동양제철화학과 방송사를 자신의 정치적 캠프로 활용하려던 박상은 회장[6]에 맞서 전면적인 방송사유화 저지 투쟁에 나섰다. 회장의 퇴진을 이끌어내고 방송위원회로부터 iTV 재허가 취소를 받아내는 성과도 있었으나 노조원 200여 명은 집단실업자가 되었다.

이후 시청자가 주인인 공익적 민영방송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2005년 경인지역 새 방송 창사 준비위원회를 꾸려 총괄책임을 맡았으며 새 방송 만들기에 전력을 다한 결과 OBS경인TV를 탄생시켰다. 이는 민영방송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은 언론자유의 상징적인 사례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OBS 정책국장으로 재직하며 방송사 재허가 취소 후 직원들을 승계하는 재허가 관련법 제정을 이끌어냈고, 중소방송사에 불리한 재송신제도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하며 방송정책전문가로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2020년 OBS를 퇴사한 뒤 동년 12월 재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외협력담당관으로 활동했다.

3. 정치 활동[편집]


2024년 2월 2일, 더불어민주당 13호 영입인재로 영입되었다. 같은 날 함께 영입된 인사로는 언론계 후배이자 똑같이 인천 출신인 노종면YTN 기자가 있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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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현재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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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대손 기(基)◯ 항렬 [2] 현재의 인천광역시 서구 당하동[3] 1960년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가 1973년 박정희 정부의 언론 통폐합 당시 경기신문, 연합신문 등 인천·경기권 3개 언론사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폐간됐다. 대중일보의 지령은 1973년 통폐합을 통해 탄생한 경인일보가 잇고 있다.[4] 1927~2001, 한국명 이남이, 인천 이씨, 경남 마산 진동면 출생, 1943년 출국[5] 이남이 씨는 1998년 5월 마침내 국적을 회복하고 영구귀국 절차를 마쳤지만 50여 년만에 돌아온 고국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같은 해 가을에 캄보디아로 돌아갔으며, 2001년 노환으로 사망했다.[6] 회장직에서 사퇴한 이후 열린우리당 서구·강화군 을 선거구 공천을 신청했으나 신동근한테 밀렸고,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19대 임기 중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