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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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李仁孫, 1395(태조 4년)∼1463(세조 9년)
조선 초기 문신. 자 혜백(惠伯),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시호는 충희(忠僖).


2. 생애[편집]


본관은 광주(廣州)로 아버지는 아버지는 참의 이지직(李之直)이다. 1417년(태종 17년)에 검열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세종 시절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고 단종시기 한성부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을 거쳐, 계유정난 이듬해인 1454년,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1459년(세조 5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나 잉령치사[1] 되었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3. 기타[편집]


이인손 본인은 크게 유명하지 않지만 유명한 사람들과의 일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먼저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 이극균(李克均)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판서 이상의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죄로 죽임을 당한 이세좌(李世佐)가 둘째 이극감의 아들이고 이세좌의 손자는 명종, 선조 대의 명재상인 이준경이다. 넷째 이극돈은 무오사화의 주요 인물로 유명하다.

두 번째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과 관련된 것이다. 세종대왕릉의 원래 위치는 다른 곳이었지만 이인손이 쓰려던 곳으로 옮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릉 참조.

세 번째는 세조의 술자리 일화 중 하나이다. 갓 영의정과 우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권람이 세조의 술자리에 초를 치자 세조는 화를 내고 영의정과 우의정을 바꾼다. 5일 뒤 세조는 정신이 들었는지 관직을 다시 원위치 시키는데 영의정으로 임명했던 신숙주는 실직인 좌의정으로 옮겨줬지만 이인손은 실직으로 옮겨주지 않고 우의정에 잉령치사한다. 보통 잉령치사는 퇴임하는 노대신에게 퇴임 전 관직을 가지고 있게 해주는 조치로 예우 차원의 일인데 이인손만 어정쩡한 우의정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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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仍令致仕, 의정(議政) 벼슬에 있는 사람이 퇴임시키되 직함을 가지고 있게 하는 것. 원래 명예로운 조치이나 이인손의 경우에는 황당한 사건에 연관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