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경(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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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李原景
(? ~ 1435)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인물. 고려계 몽골인으로 몽골식 이름은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다.


2. 생애[편집]


고려 말에 요양행성에서 동지(同知) 벼슬을 지내고 있었고, 요양행성평장정사 기사인테무르[1]와 함께 동녕로총관부에 있었다. 1370년 1월[2], 제1차 요동정벌이성계가 동녕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라산성(亐羅山城)에 주둔해 고려군을 막았다. 이성계가 야둔촌(也頓村)에 도착하자 오로테무르가 출진해 이성계에게 도전했다. 이성계에게 맞서던 오로테무르는 곧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제 선조는 본래 고려인이니, 신하가 되기를 바랍니다.[3]

라고 항복을 청했다. 오로테무르는 휘하 3백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했고 이름을 이원경으로 개명했다. 한편 추장 고안위(高安慰)는 저항을 계속했다. 고려군은 성을 포위했고, 이성계가 놀라운 사격 솜씨를 보이며 수비군의 기세를 꺾자 결국 인근 1만호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1월에는 요성(遼城, 요동성) 전투에 이성계를 따라갔다. 요성에는 처명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이원경은 이성계의 명에 따라 처명에게 항복하여 이성계를 섬기도록 회유했다. 처명은 이원경의 권유를 거절했지만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이성계에게 항복했다.

한편 이성계가 홍원(洪原) 조포산(照浦山)에서 사냥을 할 때 이원경이 따라나선 일화가 있다. 노루 세 마리가 나타나자 이성계가 먼저 한 마리를 쐈는데, 나머지 둘이 달아나자 그대로 화살을 쏴 두 마리를 꿰뚫고 나무에 박혔다. 이원경은 한참 뒤에야 화살을 들고 돌아갔는데, 왜 늦었냐는 이성계의 물음에 화살이 너무 깊이 박혀 빼기 힘들었다고 답했다. 이성계는 이원경에게 웃으면서 자신은 노루 세 마리가 있었더라도 관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관직이 검교문하부사에 이르렀고, 아들 이인화의 말에 따르면 을묘년(1435년)에 죽었다.#


3. 가족관계[편집]



이원경의 가족은 대대로 길주에서 거주하며 백성과 토지를 차지해 부를 쌓았다. 아들 이인화는 관직이 판영흥대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이원경의 손자 이시애는 조선의 중앙집권화를 거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패하고 효수됐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08:43:42에 나무위키 이원경(조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기철의 아들[2]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원경이 3백호를 이끌고 항복한 것은 2월의 일이다.[3] 吾先, 本高麗人, 願爲臣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