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테현 오후나토선 공사장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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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배경
3. 동맹 파업
4. 합의 파기
5. 학살
6. 사후 전개
7. 기타


1. 개요[편집]


1932년 5월 4일, 일본 이와테현岩手縣 게센군氣仙郡 야하기촌失作村오후나토선 철도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학살 사건.[1]


2. 사건 배경[편집]


1906년 일본은 철도국유법에 근거해 17개의 사설철도를 국유화했지만, 지방 철도를 새로 부설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1910년 기존의 사설철도법을 완화하는 경편철도법軽便鉄道法을 재정하여 기존보다 낮은 규격으로 설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일정 수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였다. 이듬해에는 국유철도도 해당 법령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개정하면서 예산은 향후 법령의 개정여부와 상관없이 1929년도까지 확보했다. 오후나토선大船渡線은 1925년 공사를 시작한 까닭에 국유철도이면서 경편철도법의 혜택을 받았다.[2]

1931년 야하기촌 주변에는 이치노세키역사카리역을 잇는 공사가 3개 구역으로 나뉘어 한국인 노동자 600명과 일본인 노동자 300명이 종사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1962.09.17~2023.10.29) 교수가 이끌었던 「토호쿠지방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東北地方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 산하 이와테지역조사반岩手班 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고 일본 평균 일당 1엔 30전에 못미치는 80전을 받았다. 또한 각종 소모품을 강매당하여 실수령액은 훨씬 적었다.[3]

조선인의 생활은, 거적때기에 누워 자는 동물 취급을 받는 끔찍한 세계였어.

당시 현장 인부 칸노 세이간菅野青顔의 증언[4]



3. 동맹 파업[편집]


1932년 4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 소속 구순암具順岩과 정순옥鄭順玉 등이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현지 지도를 위해 강유홍姜有鴻 · 김범이金凡伊 2인을 파견했다.[5][6]

같은해 4월 26일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飯場를 거점으로 한국인 60여명과 일본인 4명이 참가한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10시간 노동, 임금 30% 인상,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 총 8개 조항을 요구하였고, 동년 동월 28일 약 200명의 노동자들이 오전 7시경부터 작업을 중지하고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노동자들을 대리하여 9명으로 구성된 교섭위원들이 아이다쿠미有田組와 협상에 임하였고 사측이 8개 중 6개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면서 양측은 합의서에 조인했다. 이후 파업 지도부는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하여 논의했다.[7][8][9]


4. 합의 파기[편집]


같은해 5월 2일 아이다쿠미는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를 중심으로 일본인 노동자들을 소집하여 협상 결과를 알리면서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의 내용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애초에 동맹파업은 일본인도 참가한 쟁의였으며, 해당 합의사항은 한일 노동자 모두 수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다쿠미는 다이나마이트, 곡괭이 등 살상력을 가진 작업 도구를 흉기로 지급하면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10]


5. 학살[편집]


같은해 5월 4일, 오후 5시 무장한 일본인들은 공사 현장 내 4~5 ㎞ 흩어져 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간이숙소 중 특별 수당을 요구했던 인물을 찾아내어 폭행을 가했다. 강유홍도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나 탈출하여 관할 야하기 주재소에 신고했지만 묵살당했고, 인근 병원은 그에 대한 치료를 거부했다. 이후 강유홍은 공사 현장 내 간이식당 '모찌야餅屋'에서 김범이, 구순암, 정순옥 등과 대책을 숙의하던 중 오후 8시 30분 재차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강유홍, 구순암, 정순옥 3인이 피살되었고 김범이는 중상을 입었다. 이들 외 한국인 노동자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나머지 한국인들은 인근 숲속으로 대피했으나 이들에 대한 추적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일본인 가담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조선인을 죽여라朝鮮人を殺せ」라고 외치는 등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한민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사카리경찰서(현 오후나토 경찰서 大船渡警察署)에서 출동한 경찰 병력은 한국인 81명을 일본인을 습격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11][12][13]


6. 사후 전개[편집]


같은해 5월 6일 사망한 세 사람의 주검은 검사의 입회 아래 부검을 거쳐 동년 동월 8일 오후 2시 가매장되었다. 같은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이와테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동년 동월 9일 조사원 4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또한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사단解放運動犧牲者救援辯護團은 해당 사건에 대한 법률지원을 제공하여 가해집단 중 53명에 대하여 살인죄, 소요죄, 상해죄 혐의를 적용한 기소를 이끌어냈다.[14][15]

모리오카지방재판소盛岡地方裁判所에서 개시한 공판에서 피고측은 한국인이 흉폭하게 행동하여 정당방위 차원에서 저지른 행위였음을 강조했다. 피고측 변호인은 「군중심리에 의해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었으며,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공산당 계열이므로 피고인들에 대하여 집행유예가 합당하다」 라는 취지로 변론했다.[16]

(원청 회사인 아이다구미가) '허위 증언을 하라'고 하는 거야. '조선인에게 먼저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이 쪽도 습격했다'라고 증언하라는 거야.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다는데, 돈을 받았으니 어쩌겠어.

당시 현장 인부(성명 미공개)의 사후증언[17]


1933년 1월 재판부는 피고인 53명 중 29명에게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나머지 24명에게 벌금형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살인의 고의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다쿠미는 이와테사건대책위원회에게 부상자와 조합이 입은 피해에 대한 위문금을 지급했다. 또한 경찰을 통해 사망자의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유족의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해 실제로 전달되지는 않았다.[18][19][20]


7. 기타[편집]


  • 야하기촌 일대 작업장의 한국인 노동자 숫자는 600명으로 일본인 노동자 300명 보다 많았으나, 사건이 발생한 제13공구는 한국인 60명, 일본인 100명으로 역전되어 있었다.[21][22]

  • 아이다쿠미有田組에 대하여 주 나고야 총영사관 자료에는 폭력단을 조직한 주체로 설명하였고,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는 아이다쿠미가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했다고 서술했지만 폭력단과의 관계가 누락되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에는 폭력단의 명칭을 아이다쿠미로 기재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는 아이다쿠미를 청부업체로 표기하면서 노사협상 주체이자 폭력단을 조직한 배후로 기술했다. 오노데라 노리오小野寺教郎가 저술한 「산리쿠의 철로 그 빛과 그늘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에는 당시 관련 재판에 출석한 일본인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아이다쿠미를 원청업체(元請けの有田組)로 기재했다.[23][24][25][26][27][28]

  • 학살에 가담한 일본인은 대부분 외지인이었지만 당시 야하기촌의 경제에 영향을 미쳤기에 마을 주민들은 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고, 일부 마을 주민도 가담했던 까닳에 언급을 금기시 했다. 이로 인해 암암리에 전해지던 사건은 인신공양으로 변질되었다.[29]
참혹한 현장이 되어버린 근처 터널에서 조선인을 인주人柱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 조선인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리쿠젠타카타시 야하기정 출신 이토 이쿠오伊藤郁夫의 증언[30]

  • 1959년 이와테현경본부岩手県警本部에서 간행한 '이와테의 중대범죄·그 수사기록岩手の重大犯罪・その捜査記録'에 학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들이 처했던 노동환경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들의 쟁의 행위가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논조로 서술되었다. 리쿠젠타카타시에서 편찬한 '리쿠젠타카타시사陸前高田市史'에는 학살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그나마도 이와테현경본부의 간행물에 근거하고 있다.[31]

  • 야하기 주재소 근무자였던 코마츠바라 린사쿠小松原林作 순경은 첫번째 피습을 당하고 찾아온 강유홍의 신고를 묵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테현경본부의 간행물에는 린사쿠는 본서本署인 사카리경찰서에 '가벼운 몸싸움'으로 보고하여 초동 대응이 미흡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린사쿠 본인은 사카리 경찰서로부터 「직원들이 꽃구경을 가서 아무도 없다,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라」는 회신을 받았다고 생전에 아들에게 구술했다. 사건 이후 린사쿠는 진급에서 누락되었다.[32]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관동대지진의 사건을 일으켰소. 야하기에서 일어난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코마츠바라 린사쿠의 아들 코마츠바라 스스무小松原進[33]
  • 진상 조사에 법률 지원을 제공한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사단의 간사장은 훗날 일본 국적으로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였다. 다만 사건 당시 후세 변호사는 다른 재일한국인 사건을 맡고 있었고, 동시에 일제의 탄압으로 금고형을 선고받는 등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1935년 출소 후 야하기촌 일대를 직접 조사했다.[34]

  • 강유홍과 함께 파견되어 중상을 입은 인물에 대해서 국가보훈부의 학술회의 자료에는 김범이金凡伊로 기재하고 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는 김호金虎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어 발음을 기준으로 두 이름에서 호랑이를 유추할 수 있으므로 동일 인물의 이명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4~5개의 이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확인이 필요하다.[35][36]

  • 1932년 6월 8일 강유홍, 구순암, 정순옥에 대한 추도식이 가매장지에서 열렸다. 그러나 매장지의 위치는 현재 불명확하다.[37][38]

  •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유홍, 구순암, 정순옥 3인에 대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망 원인은 2016년부터 정부가 실행했던 『일본지역 한국독립운동가 찾기』 과정에서 파악되었다. 세 사람 모두 후손 및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 유공자로 분류되어 있다.[39][40]

  •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오후나토선 내 역과 교량이 다수 유실되었고 2020년 4월 공식적으로 폐선되었다. 해당 노선은 2013년부터 간선급행버스로 대체 운행함에 따라 사건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기 어려워 졌다.[41][42][43]

  • 2024년, 간이식당 '모찌야'가 있던 자리는 어떠한 표식도 없이 호두나무 군락만 확인되었다.[44]

  • 이와테현 다키자와시滝沢市에는 조선인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는 강제 징용 희생자 166명에 대한 추모공간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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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리쿠젠타카타시陸前高田市 야하기정矢作町[2] 軽便鉄道法, 明治43年4月21日法律第57号[3] '関東大震災から9年後、虐殺は「平時」にも起きていた', 安田 菜津紀, Dialogue for People 2024.1.4[4] 朝鮮人の生活は、むしろに寝かされて――動物扱いで、ものすごい世界だったんだ。《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 小野寺教郎,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5] '재외한인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일본 지역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임영언(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6] '200206 훈장미전수자 명단(일본)',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7] '강유홍姜有鴻', '구순암具順岩',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8] '岩手県大船渡線鉄道工事場スト', 法政大学大原社会問題研[9] '이와대현 조선인 학살사건 (岩手縣 朝鮮人 虐殺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10]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1] 일본 공식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은 사망 3명 · 중경상 19명, 일본인은 중경상 3명이다. 일본인 피해자 1명은 한국인과 함께 생활하던 여성이었고, 나머지 2명은 상호간 폭행이었다. 재판 기록에는 신원 미상의 한국인 여성 1명에 대한 성범죄가 기록되어 있다.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2]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3] '矢作事件' ウィキペディア 2023.10.04[14]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5]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6]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7] (元請けの有田組が) “嘘の証言してけろ”って言うんだもの。“朝鮮人に先に攻められたんで、こっちも襲撃した”っつう証言をしろって言うのっさ。謝礼はうんとすっから、と言われたが、そんな金もらっても仕方ねえもの。《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 小野寺教郎,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8]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9]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0] 矢作事件' ウィキペディア 2023.10.04 재인용[2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22]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3] '구순암具順岩',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4] '강유홍姜有鴻',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5]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26]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7]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28]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 재인용[29]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0] 過酷な現場となったこのあたりのトンネルでは、朝鮮人を“人柱”にしていたとも言いますね。あの頃の朝鮮の人たちは“人扱い”ではなかったと聞いています。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2]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3] 日本が朝鮮に侵略し、朝鮮人に対する差別が関東大震災の事件を起こした。矢作で起きた事件も、同じことですよ。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4]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와 조선', 이규수, 내일을 여는 역사 2020년 봄호(통권 제78호) 2020.3[35]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36]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37]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38]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39] '강유홍姜有鴻', '구순암具順岩',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40]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4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42] '大船渡線BRT、4月26日からバス専用道を延伸', レスポンス 2013.03.30[43] 'JR東日本、気仙沼線・大船渡線BRT運行区間の廃止日を4/1に繰上げ', マイナビニュース 2020.01.31[44]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45] '제27회 이와테현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 위령제 참석', 주 센다이 총영사관 202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