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열사)

덤프버전 :


파일:이동수 열사.jpg

아니오 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1962년 ~ 1986년 5월 20일
1. 개요
2. 생애
3. 장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열사.


2. 생애[편집]


이동수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생활 동안 그는 과묵한 편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보면 당당하게 저항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입학한지 두달 밖에 안된채 군대에 갔다. 85년 그가 군대에 있었을 때에는 상부에서 여당에게 투표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럼에도 야당에 투표해서 남은 군 생활을 괴롭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대학 내의 권위주의도 반발하여 선배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터라 그는 비운동권처럼 여겨졌다. 그의 출신이 중산층이기도 했고 그에게 거는 집안의 기대 또한 컸기 때문이다. 사회적 비판의식은 있으나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는 현실에 그는 늘 괴로워했다. 그러던 그는 큰 결심을 하고 문익환 목사가 연설을 하던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 학생회관 옥상으로 올라가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고 외치고 반미,반일 성향의 유인물을 뿌리고 분신하여 추락했다.

파일:분신하는 이동수 열사.jpg

온몸에 분신자살을 기도한채 옥상에서 추락한 그는 온몸이 불타 심한 화상을 입었다. 결국 병원으로 이송되던중 숨졌다. 이동수에 분신자살 소식에 분노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 정문까지 시위를 하며 전진했으나 경찰의 진압에 시위대열은 흩어졌다. 이동수가 숨진지 이틀후 5월 22일 학생들이 아크로에서 이동수 추모제를 열었고 이동수의 유서를 받은 이상욱씨는 1년간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당시 이동수가 분신하여 투신하는 사진이 남아있다.

3. 장례[편집]


이동수가 분신한날 사망한 이재호와 5월 3일 사망한 김세진과 함께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1 14:51:06에 나무위키 이동수(열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