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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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증삼(李曾參)[1]
자 / 호
관부(寬夫) / 화성(化晟)
본관
함안 이씨[2]
출생
1913년 3월 27일
경상남도 고성군 서읍면 양덕리
(現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덕선리 양덕마을 616번지)
사망
2003년 3월 14일 (향년 89세)
경기도 성남시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55호
상훈
건국포장 수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이갑영 전 경상남도 고성군수는 이기윤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1913년 3월 27일 경상남도 고성군 서읍면 양덕리(現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덕선리 양덕마을 616번지)에서 아버지 덕포(德圃) 이진용(李鎭龍, 1886. 11. 19 ~ 1948. 12. 25)[3]과 어머니 합천 이씨(1888. 8. 26 ~ 1914. 4. 9)[4]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7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하며 노예식교육 폐지, 일본 제국 경찰의 교내 진입 금지,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구금 학생 석방 등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에 2학년 주동자로 체포되었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정학을 당했다가 나중에 복학하였다. 1933년 11월 27일에는 한계수(韓桂壽)·전사옥(全駟玉)[5]·장준(張駿)·황진생 등과 함께 비밀결사 적색독서회[6]를 조직하고, 이기윤 자신은 5학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8개월간 동지를 모으는 등 조직을 확대하고 사회과학서적을 돌려가며 읽었다.

그러던 1934년 5월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사이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934년 8월 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진주고등보통학교에 복학해 졸업했다.

8.15 광복초등교사에 임용되어 교단에 섰고, 초등학교 교장에까지 오른 뒤 퇴임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2003년 3월 14일 오전 1시 30분에 경기도 성남시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2003년 3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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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직후에 이기윤으로 개명했다고 한다.[2] 운포공파(雲圃公派) 24세 수(洙)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둘째 남동생 이호수(李皞洙, 1936. 9. 6 ~ )가 항렬자를 썼다.[3] 자는 위현(渭賢).[4] 이정주(李正柱)의 딸이다.[5] 김사옥(金駟玉)으로 오기된 자료도 있다.[6] 다른 명칭은 학생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