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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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구범경찰.gif

李九範
1902년 ~ ?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일본 제국대한민국의 경찰, 친일반민족행위자. 본명은 이봉세(李鳳世). 창씨명은 오오야마 타카시(大山隆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항공회사를 설립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을 돕기도 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들에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누명을 씌우는 데 가담했다.


2. 생애[편집]


1902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1922년 3월 경성부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순사로 일했다. 즉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기 시작하였다. 1930년 5월 12일 경기도지사가 주관한 경기도 순사부장 시험에 합격하여 1931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 순사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33년 3월 치러진 제14회 조선총독부 도경부(道警部) 및 도경부보(道警部補) 고시에 합격했다.출처

1934년 4월 고등경찰과 순사부장으로 재직 중 이재유를 검거하기 위해 조직된 총지휘부의 강원도조사반 제1반에 소속되어 강릉군 신리면 주문리 주문진, 양양군 등지에서 관련자 검거에 참여했다. 나중에 광복 후 친일파 이구범은 처벌받지 않고 승승장구하고, 이재유의 동지인 이관술은 이구범에게 취조당하고 누명을 쓰게 되는 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1]

1935년부터 경기도 여주경찰서 경부보에 임명되어 근무했으며, 1937년 3월 다시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보로 옮겨 1940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개성경찰서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 송도항공회사(松都航空會社)를 설립해 일제의 전쟁에 협력했다.출처

친일 행위로 원한을 엄청나게 많이 샀는지, 광복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개성시민들은 이구범의 집에 몰려가서 불을 질렀다. 그러자 이구범은 서울로 피난와 다시 본정경찰서에서 경무주임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초 경기도 개성경찰서 서장으로 임명되자, 개성시민들은 일제강점기 개성경찰서에 근무할 때의 이구범의 친일행위를 규탄하며 배척 운동을 벌였다. 이구범은 다시 서울로 쫓겨와 다시 본정경찰서에서 경무주임으로 근무했다. 1월 4일 전 본정경찰서장이 사표를 내자 본정경찰서 대리를 맡게 되었다.출처

1946년 1월 12일 장택상이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취임하자 이구범은 장택상을 찾아가 자신을 본정경찰서장으로 임명할 것을 부탁했다. 장택상은 1월 26일 서울 시내 서장 인사 단행시 이구범을 본정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출처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의 행적은 문서 참고.

1948년 9월 수도관구경찰청 부청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를 피하여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반민특위가 해산된 이후 귀국하여 복귀했다. 1952년 7월 28일부터 1953년 3월 23일까지 제10대 강원도경찰국장(경무관)이 되었다. 거기서는 공비 토벌에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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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관술은 이 간접 인연보다는 직접 엮인 노덕술과의 악연의 임팩트가 훨씬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