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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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일생[편집]


이광윤은 여주인으로 조선조 명종(明宗) 원년(1546) 청양군 비봉면에서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인자하고 의(義)를 존중하며 부모를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에 33세가 되던 해에는 효행(孝行)으로 추천받아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문소전(文昭殿)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후 고향에 있던 이광윤에게 선조 25년(1592) 4월 왜구가 침입하였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이광윤은 곧 바로 창의(倡義)할 것을 생각하고 부모님의 승낙을 받은 뒤 친우(親友), 친척 및 향리의 장정들을 모아 300여명의 창의군(倡義軍)을 조직하였다. 그 뒤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금산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금산 싸움에서는 전투에 참가한 전원이 전사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의거하여 이광윤은 조정으로부터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라는 증직(贈職)과 함께 명정(命旌)을 받았고 조헌과 함게 종용당(終容堂)에 배향(配享)되었다. 그후 헌종(憲宗) 6년에는 유림(儒林)들의 進言에 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吏曺判書 兼 知義禁府使 五衛都總府都總官)의 추증(追贈)이 있었다.


3. 정려[편집]


이광윤 정려가 위치한 곳은 장곡면 소재지에서 청양 방면의 동남쪽으로 약 6㎞ 지점에 있는 옥계리의 제실 마을 남쪽의 동향 사면에 자리한다.

정려는 목조와즙(木造瓦葺)으로 건립하였고 그 안에 명정 현판을 걸어 놓았다. 먼저 동쪽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에 일정한 대지를 조성하고 팔각형의 주초석(柱礎石)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고 가구(架構) 양식은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지만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하였다. 정려의 안에는 중아의 윗쪽에 명정 현판을 걸어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신

忠臣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선무랑 문소전 참봉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行 宣務郞 文昭殿 參奉

증 익의헌공 이광윤지문

贈 謚毅憲公 李光輪之門

선조조 명정

宣祖朝 命旌



이광윤묘(李光輪墓)는 충청남도 홍성군 장계면 옥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77년 7월 4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4. 관련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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