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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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以泰
1652년(효종 3) ~ 1715년 2월 27일(숙종 41)

1. 개요
2. 개설
3. 생애 및 활동 사항
4. 조선의 홍역 태두
5. 이름이 빼앗긴 유이태
6. 5도(道) 실천
7. 의학 사상
8. 유이태 건강관리법
9. 유이태가 남긴 유훈 시(詩)
10. 사우(친구)와 제자
11. 의의와 평가
12. 설 화
13. 강강술래에 등장하는 유이태
14. 유적지
15. 유이태가 류의태(유의태, 柳義泰)로 바꾸게 된 과정
1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조선의 한의사. 자는 백원(伯源).
별칭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 인서.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679에서
1652년에 태어나 1715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가문, 왕실기록과 사우들은 劉以泰,
그가 남긴 의서에는 劉爾泰이고,
자는 백원, 호는 신연당, 인서, 원학산인이다.

관직은 어의(御醫)를 지냈고,
숭록대부 품계와 안산군수를 제수받았다.

저서는 전해지는 <마진편>, <인서문견록>, <실험단방>과
1975년 대학교 교수라는 두분이 가져간 잃어버린 2권 의서와 1940년대 초반에 종가집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과 <부인방>을 남겼다.

전해지는 유품에는 <유이태유고>, 예조에 올리는 예조정장 <유이태 효행장>, 경상도 관찰사에 보내는 <정영장>이 있으며, 경북 인동(구미)의 관리에게 보냈던 <간찰>이 있다.


2. 개설[편집]


40년간 향의(鄕醫)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고, 어의로 활동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의원(儒醫)으로 조선인 최초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였으며, 유이태탕’과 ‘순산비방’ 등 가장 많은 명의 설화를 남겼고,『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살신성인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柳義泰)의 모델 인물이다.


3. 생애 및 활동 사항[편집]


유이태의 생애는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어진다.

소년기 :
∙ 어릴 때 병을 앓았는데 혼자서 의서를 읽고 병을 고쳤다.
∙ 10세 전후에 모친이 요절하자 묘소 앞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 부모를 모시는데 의학을 알아야 한다며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여 3년 만에 의원이 되었다.

청년기 :
∙ 인근 마을, 산음, 거창, 함양, 단성, 합천, 대구, 진주, 의령, 창원. 남원,..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였다.
∙ 수많은 백성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영남, 호남, 충청을 돌아다니며 인술을 펼쳤다.
∙ 의창을 주관하여 굶주림에 있는 백성들을 구하였다.
∙ 1685~1686년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었다
∙ 자신의 가진 것이 모자라자 경상좌우도 사우들에게 백미 100여석을 빌려와 나누어 주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였다.

장년기 :
∙ 호흡기 감염병 홍역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였다.
∙ 수많은 백성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침구방>, <부인방> 등 의서 저술하였다.
∙ 백성들에게 질병 치료도 중요하지만, 질병에 걸리지 않는 질병 예방을 주창하였다.
∙ 후학을 가르쳤다.

노년기 :
∙ 한양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 임금으로부터 1710년과 1713년 두 번의 부름을 받아 어의가 되었고, 도수환 처방으로 임금 숙종을 치료하였다.
∙ 숙종 임금의 병을 고친 공로(功勞)로 말 한마리와 비단을 받았으며, 안산 군수 제수되었고, 숭록대부 품계를 받았다.


4. 조선의 홍역 태두[편집]


조선왕조가 가장 무서워했던 질병은 마진(홍역)과 두진(천연두)이다. 1613년 조선에 처음으로 홍역이 발생했다. 1680년과 1692년 홍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이태는 홍역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 홍역을 직접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인 최초로 저술한 홍역 치료서이다.

유이태의 홍역 치료 방법은 다산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영향을 끼쳤다. 이같이 ‘유이태’는 홍역학의 태두(泰斗)로서 조선의 마진(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으며, 산청을 홍역 치료 발상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의 전염병 퇴치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5. 이름이 빼앗긴 유이태[편집]


유이태(劉以泰)는 매우 기구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생애가 기구한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기구한 운명에 처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5道를 실천하며, 의창을 주관하여 굶주림에 있는 백성을 구하고 인술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던 그의 향리 산청군청 공무원에 의하여 안타깝게도 재조명되지 못했고, 산청군청 군수들과 공무원들에 의하여 유이태의 이름이 허구 인물 유의태(柳義泰)로 바뀌었으며, 유이태의 사적이 가짜 유의태(柳義泰)로 바뀌어졌다.

숙종의 환후를 고친 공로(功勞)로 안산군수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관직을 고사하고 향리 산음(현재 산청)으로 돌아와 오직 병마(病魔)에 고통을 받고 있던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술(醫術)만을 생각했다.


6. 5도(道) 실천[편집]


유이태는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일생을 5도(道) - 정도(正道), 효도(孝道), 시도(施道), 의도(醫道), 수도(壽道) - 를 실천했다.

∙ 바른길을 걷는 정도(正道)는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도리이다.

∙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는 자식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리이다.

∙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나눔을 실천하는 시도(施道)는 가진 사람들이 실천해야 하는 도리이다.

∙ 부를 탐하지 말고 병의 근원을 탐구해 증세에 따라 처방하고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는 의도(醫道)는 의원들이 받아 들어야 하는 충고이며, 길이다.

∙ 평상시에 건강할 때부터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건강하게 오래 살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수도(壽道)는 백성들이 실천해야 하는 길이다.


7. 의학 사상[편집]


유이태의 의학사상은 인생관, 정신관, 학문관, 수기관, 치병관, 의약관 등 6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인생관 :
부모를 공경히 섬기기 위하여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하며, 가족보다는 백성을 먼저 돌보아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정신관 :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친소·민관·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피는 위민(爲民)·애민(愛民)정신을 펼치는 박애정신을 펴는 것이다.

∙ 수기관 :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본심(本心)을 잃지 않고 의로운 일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 학문관 :
후세에 공(功)과 혜택을 후세에 넘기고, 후학(後學)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 의학이 날마다 발전되는 것이다.

∙ 치병관 :
건강할 때부터 절제하는 생활로 병을 예방하고, 발병하면 근원을 찾아서 신속히 치료하며, 병이 완치된 이후에 철저한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다.

∙ 의약관 :
자연환경에서 구할 수 있는 향약재를 이용한 치료법 개발하여 채록하고, 치료한 사례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향약 의학을 고수하는 것이다.


8. 유이태 건강관리법[편집]


유이태는 백성들에게 장수를 위한 건강관리법을 남겼다.

사람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평상시의 마음가짐, 섭생(攝生), 소식(小食), 절제 있는 생활, 질병 예방, 질병 초기 치료, 생명 중요성 그리고 의원들에게는 약의 중요성, 새로운 처방 등 건강 관리법을 남겼다.

∙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고, 근심이 지나치면 마음을 해(害)하니 마음을 다스려라.
∙ 화를 내면 화기가 일어나 치료가 어려우니, 노여움을 경계해라.
∙ 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攝生)하여 몸을 튼튼하게 해라.
∙ 과식하면 몸을 해(害)하여 질병의 근원이 되니 소식하라.
∙ 몸을 힘들게 하면 원기가 허(虛)하게 되니 절제된 생활을 해라.
∙ 병은 몸을 해(害)하니 건강할 때 질병을 예방해라.
∙ 목숨이 재물보다 중요하니 치병(治病)에 최선을 다해라.
∙ 조그마한 병(病)이 큰 병으로 변하니, 발병 초기에 신속히 병을 치료하라.
∙ 병이 완쾌한 이후에 새로운 질병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질병 발생을 대비하여 철저하게 건강 관리해라.
∙ 치병(治病)시 병의 근원이 되는 곳을 탐구하여 치료해라.
∙ 약물을 잘 복용하면 모든 병(病)을 물리칠 수 있다.
∙ 의원은 처방에 따라 정확한 약제를 투약해라.
∙ 병을 치료하는 동안 약(藥)의 오남용을 주의해라.
∙ 기존 처방에만 의존하지 말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새로운 처방을 해라.

의학의 발전과 질병없는 세상을 꿈구었다.


9. 유이태가 남긴 유훈 시(詩)[편집]


유이태는 인서문견록을 저술하면서 그의 의학 정신을 담은 시를 남겼다.

余無功利及於人(여무공리급어인) 내가 사람들에게 베푼 공(혜택)이 없었으니
以是傳之萬病春(이시전지만병춘) 이로서 전하여 만병의 치료에 전한다.
手錄年年成一冊(수록년년성일책) 해마다 내가 손수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으니
後來觀者補相新(후래관자보상신) 훗날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덧보태어 이 책을 새롭게 하길 바란다.

豈獨爲子孫計(기독위자손계) 이 책을 지은 것이 어찌 내 자손들만을 위한 계책이었겠는가?
猶且濟衆人心(유차제중인심) 오히려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라네.
盖無病都無用(개무병도무용) 무릇 세상에 병이 없으면 역시 이 책 또한 쓸모가 없을 것이니
願書閣長不尋(원서각장불심) 서재에 감추어 두고서 영원히 찾지 않기를 바란다.


10. 사우(친구)와 제자[편집]


친구들은 양주조씨 조태로(평안도관찰사), 청주한씨 양절공파 한배하(공조판서), 초계정씨 참봉 정중원, 교관 양처제, 찰방 이세일, 여흥민씨 민두삼, 안동권씨 권만적, 반남박씨 박수일, 임대하, 정정, 이현원, 강헌세, 이현, ....이고,
제자들은 노세흠, 권덕중, 박계량,,... 등이다.

1715년 세상을 떠난 유이태에게 조태로는 조문 편지를 보냈다.

一見知爲長者人 한번 보아도 큰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었으니
嶠南標望著鄕隣 영남의 높은 명망 향촌 사람들에게 드러났네.
行推仲景居家孝 행실은 장중경(張仲景)을 미루어 집안에서 효도하고
術擇丹溪及物仁 의술은 주단계(朱丹溪)를 택하여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네.
話舊前年重會面 옛날부터 알고 지냈는데 지난 해 1714년에 다시 만났는데
承㐫今日倍傷神 흉한 소식 들은 오늘 마음의 상처가 더욱 크네.
向來高義中心感 지난날의 높은 뜻이 마음 속 깊이 느껴져
惟共阿沉淚湿巾 오직 언덕을 향해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경남 함양군 유림면에 살고 있던 유이태의 제자 노세흠은 스승 유이태는 환자를 치료할 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귀천과 친소를 차별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병자를 돌보았다고 말하였다.

至於抱病而來 錄症而至者 無貴無賤 無親無踈 竭其誠意 酬應如流
人皆感德而相語曰 天生此仁 生活人命 享其福而永其壽者 非此人而誰.
此非但稱其術之妙 而感其心之勤也. ≪盧世欽≫

병에 걸려오거나 증세(症勢)를 적어서 오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귀천(貴賤)도 가리지 않고 친소(親疎)도 가리지 않고 그 정성을 다하여 응대함이 흐르는 물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덕(德)에 감동하여 서로 말하기를 “하늘이 이처럼 어진 사람을 내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니 그 복록(福祿)을 누리고 길이 장수(長壽)할 자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그 의술의 현묘(玄妙)함을 칭송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마음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일을 힘쓰는 것에 감동한 것이었다.(노세흠)

11. 의의와 평가[편집]


전염병 홍역이 창궐하자 퇴치에 공헌하였으며 조선인 최초로 홍역 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여 조선의 홍역 치료의 문(門)을 열었다. 의학 발전과 질병 예방으로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환자 치료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여 유의(儒醫)의 전범(典範)을 제시하여 참된 의사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의 의술 윤리 도덕을 확립한 인물이다.

의학의 발전과 질병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의원 동시에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진정으로 의원을 따르는 심의(心醬), 죽어가고 있던 사람을 실리는 (神醫)라고 불렸고, 사우들과 후세 사람들은 유이태의 의술을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에 비유하였다.


12. 설 화[편집]


❰유이태탕❱과 ❰순산비방❱의 설화 그리고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은 설화를 남겼고, 민속노래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는 조선의 유일한 명의이다.

❰유이태탕❱ : 효행 설화

어느 마을에 혼기를 놓치면서 늙은 홀아비 아버지를 보살피는 효성이 지극한 처녀가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의원들에게 약을 지어다 먹여도 백약이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이태 의원이 이 마을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을 앞까지 약 달이는 냄새가 나서 유이태 의원은 냄새나는 집으로 갔다. 담장 밑에서 처녀가 약을 달이고 있었다. 그런데, 약탕기 뚜껑을 덮은 문종이에 ❰유이태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이태 의원이 처녀에게 “약탕관에 유이태라고 쓰여 있는데 유이태에게 약을 지었냐?"고 물었다. 그 처녀가 대답하기를 “아버지의 위중한 병을 고치려면 명의 유이태 의원을 만나야 하는데,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날 길도 없고, 돈도 없어서 찾아갈 수 없어서 그 대신 약탕기 뚜껑에 ❰유이태탕❱이라고 쓴 후 약을 달여 아버지에게 약을 먹이면 아버지 병환이 완쾌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이태 의원은 처녀에게 “내가 유이태 의원이요. 처녀의 효성이 지극하여 나를 만나게 된 것 같은데, 내가 아버지의 약을 지어 드리겠소."라며 처녀의 아버지를 진맥한 후 약을 지어주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유이태 의원이 지어준 약 한 첩을 달여 먹고 병이 곧바로 완쾌하였다.
이에 처녀의 아버지와 처녀가 유이태 의원에게 고맙다고 사례를 하려고 했으나, 유이태 의원은 사례를 뿌리치고 가던 길을 갔다고 했다.

이 설화는 효성이 지극하면 부모의 불치(不治)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이다.

❰이태사랑바위❱ : 여우처녀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 전설

어려서 글공부를 할 때 밤마다 미인이 나타나 유혹했지만 마음 굳게 공부했다. 그 미인이 입맞춤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유이태는 이를 들어줘 그 미인의 입에서 자신의 입으로 구슬이 들어왔다가 그 미인의 입으로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이 일 이후로는 유이태는 그 미인을 그리워하다가 점차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야위어졌는데, 서당 훈장이 자초지종을 묻자 유이태를 이를 이야기하고 서당 훈장이 구슬이 입에 들어올 때 삼키라고 했다.

유이태가 그 미인을 만나 입맞춤을 하게 되자 구슬을 삼켰는데, 그 미인은 한 마리의 흰 여우로 변해 달아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이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더욱 총명해져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게 되었으며, 의술을 열심히 공부해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구슬이 사라진 후에는 평범한 재주만 가지게 되고 기억력이 줄어 건망증까지 걸릴 정도였으며, 며느리가 몸살병에 걸릴 때 콩나물을 다려 먹이려고 했다가 콩나물을 잊어먹어 비녀나물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쳤다고 한다.

❰산신령과 보서❱ :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한 설화

신연당(新淵堂) 유이태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효행이 깊었다고 한다.

화창한 어느 봄날 신연당(소년 유이태)은 책을 읽다가 뒷동산으로 바람을 쏘이러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오지 않은 양지 바른 장소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졸음이 와서 자신도 모르게 쓰러져 잠이 들었다. 신연당 꿈속에 하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고서 한 권을 보여 주면서, “너는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다. 너의 성품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부귀영화, 재물이나, 공명심을 탐하지 마라. 이 책을 너에게 줄테니 이 책을 공부하여 부귀영화, 재물을 탐하지 말고, 병에 걸려 있거나, 병 증세를 적어서 오는 자들의 신분이 높고 낮음과 친한 사람, 모르는 사람, 남자 여자,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관리나 민간인 관계없이 모든 인명을 구하는 데 정성으로 힘쓰라. 그러면 너는 먼 훗날까지 알려질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 백발의 노인이 전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주위를 돌아보니 머리맡에 꿈속에 백발의 노인이 보여 준 두터운 고서 한권이 놓여 있었다.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고서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혼자서 그 고서를 책을 읽어 보니 지금까지 공부한 책들인 <춘추>, <대학>, <사서삼경>, <논어>, <사기> 등 것과는 전혀 다른 의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새로운 내용에 재미를 붙여 수년 동안 집에서 쉬지 않고 이 책을 읽고 공부하니 병에 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신연당이 말하는 지어주는 것은 모두가 약이 되었다. 신연당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자가 모여들었고, 신연당 유이태가 지어준 약을 먹은 환자들은 모두 병을 고쳤다. 전국으로 명성이 나게 되었고, 중국에까지 알려져 청나라의 요청으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청나라 황제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황제가 주는 관직과 선물도 사양하고 단지 석물(石物)만 받은 후 고향 산청으로 돌아오셨다.

신연당 유이태는 자신의 당대에는 재물도 모으지 못했고,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했고, 청빈하게 살았다.

❰낙상벽상토(낙반비벽토)❱ : 청나라 황제를 치료한 설화 조선환려승람에 수록되어 있다.

청나라 황제가 중병을 앓게 되어 병을 고칠 수 없어서 조선에 유명한 명의를 찾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임금님은 천하의 명의로 소문난 산청의 유이태 의원에게 긴급으로 연락하여 중국 황제의 병을 고치는 명령을 하였다.

그래서 유이태 의원은 황제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나라로 가게 된 것이다. 불편하였던 그 당시의 교통 사정으로 겨우 몇 달 만에 청나라에 도착하여 보니 우기(雨期)가 시작되었다. 황제의 병을 진맥하여 보니 천문창이라고 하는 등창이었다. 이 병은 남등창여발치(男背瘡女髮痴)라고 하여 당시의 의술로서는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 부스럼의 일종이었다. 더구나 청나라 안의 이름 있는 명의는 거의 불러서 오랫동안 시들었던 병이라 난처하였다. 진맥을 마치고 객관에 나와서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머리만 점점 무거워 질 뿐 별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하룻밤 지새고 아침 밥상을 대하여 첫술을 드는데 이상하게도 밥숟가락이 뒤집혀 상 밑으로 밥이 쏟아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쓴 입맛에 이렇게 되니 식욕이 날리가 없었다. 그냥 밥상을 밀쳐 두고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착상 한 가지가 있어 쏟아진 밥풀을 거두고 남은 밥을 모두 합쳐서 객관의 벽에 대고 문대어 발랐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남은 밥 덩어리를 벽에 으깨어 붙였었다. 벽에 붙어있는 때와 함께 밥풀은 혼합된 것이다. 그러고는 차일피일 시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크게 기대를 걸고 초청한 조선의 명의가 별다른 처방도 없이 시일만 보내고 있으니 황제의 독촉은 성화같았다. 뿐만아니라 측근에서는 무능한 의원이라 하여 논란이 분분하였다. 황제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죽이겠다. 등…, 온갖 소리가 나왔다. 이럭저럭 한 달을 거의 지내고 나니 더이상 지체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때 유이태 의원은 객관의 벽에 발라 두었던 밥풀에 피어 있는 곰팡이를 긁어서 모아 깨끗하게 가루를 만들었다. 이튿날 그 곰팡이 가루를 갖고 궁궐에 들어가서 황제의 헐어진 환부에 가루를 넣어 주었다. 다시 하룻밤을 자고 들어가 보니 그렇게 오래된 부스럼이 물기가 가셔지고 차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수일 동안을 계속함에 따라 환부는 아물어 들어 남은 한달이 다 되기도 전에 등창은 완치가 된 것이다. 이로써 고종은 말할 것도 없고 청나라의 온 조정이 천하제일 명의라고 떠들썩하게 유이태 의원을 받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달의 기간이 다 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니 청나라 황제는 ‘만만치하’를 아끼지 않으면서 생명의 은인인 유이태 의원을 평생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유이태 의원은 “부모,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황제도 하는 수 없이 귀국을 허락하였고, 그 대신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이태 의원은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황제가 자기의 뜻을 사양하지 말고 한 가지만 말하라고 간청하므로 어쩔 수 없이 소원을 말하였는데 “옛부터 가산이 넉넉지 못하여 선대의 산소에 석물(石物)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 염원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황제가 말하되 “조상을 추모하는 정신이 갸륵하다.”라 말하면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니 염려 말고 돌아가라.”라고 하여 후하게 환송을 받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런 일이 있는 후로 ‘낙반비벽토’의 이야기는 산청, 거창, 함양, 진주, 하동, 남원 등에 널리 구전되고 있으며 ‘낙반비벽토’의 약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화제가 되고 있다. 우기의 시절에 벽에다 밥풀을 발랐으니 벽에 곰팡이가 슬었을 것이고 그 곰팡이는 지금의 페니실린과 같이 항균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종기에 효과가 있었지 않았겠느냐?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페니실린보다 몇 세기 앞선 발견이 아닌가 생각되며 유이태의 깊은 의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13. 강강술래에 등장하는 유이태[편집]


조선에는 수많은 명의가 있다.
그 명의 중에서 민속노래 강강술래에 채록된 인물은 유이태이다.

우리나 동네 우리 동무 강강술래
잘도 한다. 잘도나 한다. 강강술래
뵈기도 좋다 우리 동무 강강술래
(중략)
춘초는 연년이요 강강술래
왕소인들 귀불귈까 강강술래
하태 펜작 유이태도 강강술래
지병 날명을 몰라여서 강강술래
서산 행처 저문 날에 강강술래
실픈 혼백이 되어 있고 강강술래
우리가 살면 을매나 살까 강강술래
죽음에 들어 노소가 있나 강강술래
장안 청춘 소년들아 강강술래
청춘세월로 허송을 마소! 강강술래
백발이 장차 미기 온다. 강강술래
(하략) 거제군 장목면 시방리/강강술래 노래 (1984, 10, 3/양또순, 여, 1906)


14. 유적지[편집]


유이태가 남긴 유적지는 산청, 거창, 함양에 산재해 있다.
산청 생초에는 인술을 펼쳤던 혜민국, 서실, 묘소, 유이태낚시바위, 매봉재. 1713년 임금이 제공한 말을 타고 출발한 관동이 있다.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장군수약수터[1]가 있고 오부면에 마음병치료약수터(찬샘이)가 있다.
거창에는 이태사랑바위, 침대롱바위,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생가, 1714년 참봉 정중원과 술잔을 나누었던 동계고택, 선영 황산, 조부를 문안하기 위하여 넘어 다닌 다름재, 어린 시절 학문을 배웠던 서당이 있다.


15. 유이태가 류의태(유의태, 柳義泰)로 바꾸게 된 과정[편집]


산청의 전설적인 명의 유이태는 허준 관련 드라마와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유의태의 모델 인물이다.

1965년 경희대 한방병원장 노정우가 진주 거주 한의사 허민으로부터 전화 통화시 전해들은 산청의 명의 유이태 이름을 진주 근처 대성 진주 유(柳), 의로울 의(義), 클 태(泰)로 만들어 인물한국사에 논문 <허준>에 발표하였다.

이은성이 논문 <허준>에서 유의태를 읽고 소설과 드라마에서 유의태를 허준의 살신성인 스승으로 묘사했다. 물론 생존연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1968년 노정우는 허준의 성장지(산청), 허준의 스승(유의태), 허준의 조모 친정(산청군 신안면 하정리)를 삭제한 <한국의학사> 논문을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사대계에 발표했다.

2000년 2월 1일 노정우는 유철호에게 "고증을 하지 못한 점 미안하다. 허준의 스승은 역사학자가 밝혀내야할 몫이다."라고 말했다.


16. 참고문헌[편집]


  •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
  • <조선의 명의 유이태 연구>
  • <허준의 스승 柳義泰는 허구다.>
  •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유이태>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마진편>
  • <인서문견록>
  • <실험단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구비문학대계>
  • <천옹유고>
  • <묵재집>
  •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 <산청군지>
  • <산청향교지>
  • <거창군지>
  • <조선환려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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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청군청에서 柳義泰약수터로 이름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