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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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1년
경기도 부평도호부 석곶면 백석리
(현재 인천광역시 서구 시천동)
사망
1909년 2월 24일
만주 혼춘현 타두거우
본관
진주 류씨[1]
자 / 호
중일(仲日) / 백초(白樵, 白草)
초명
류인무(柳寅茂, 柳仁茂)
이명
류안무(柳安茂)·류완무(柳完懋)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김구와 인연을 맺다
2.3. 북간도에서의 행적
2.4. 암살
3. 사후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인천향토사가 고 이훈익 옹이 편찬한 <인천지지(仁川地誌)>와 그가 감수한 <서구향토지>, 그리고 <진주류씨 세보>에 따르면, 유완무[2]는 철종 12년(1861년) 부평도호부 시천리의 진주 류씨 이류계 가문에서 아버지 유보형(柳輔衡)과 어머니 여흥 민씨 민열훈(閔說勳)의 넷째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진주류씨 파보>에 따르면, 그의 장인은 풍산 심씨로, 종9품 감역관을 지낸 심석(沈襫)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살았으나, 5대조 유광벽(柳光璧)이 종3품 부산진첨절제사로 있으면서 정조 10년(1786년) 동래부가 바치는 왜공(倭供)의 숯을 절목을 무시하고 추가로 징수하다 발각되는 바람에 부산진에 유배되었고, 이후로 유완무 집안의 벼슬길은 막혀 버렸다. <진주류씨 파보>에 따르면, 유완무는 무주로 이사가서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유완무는 지체 높은 양반으로 학자의 기풍이 있었고,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상민 출신인 김주경과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2.2. 김구와 인연을 맺다[편집]


1896년 3월 8일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상인 쓰치다를 살해한 뒤 해주감옥에 투옥된 사건이 발생했다.(치하포 사건) 유완무는 김주경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청년 13명을 뽑아 모험대를 조직한 뒤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창수를 구출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거사일 사흘 전에 김창수가 다른 죄수들과 함께 탈옥하면서,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유완무는 김창수의 행적을 추적하다 한성 공덕리에 소재한 자신의 동서 박태병의 집에서 김구와 만났다. 훗날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유완무가 "작은 키에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의복을 검소하게 입었다"고 묘사했다. 김창수는 자신의 거사가 용두사미에 불과한데 그가 너무 크게 마음을 써주었다고 말했다. 이에 유완무가 대답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그러면서 편지 한 통과 노자를 주면서 총청도 연산군에 사는 이천경에게 가 있으라고 부탁했다. 김창수는 이천경의 집에서 큰 대접을 받고 한 달을 지내다 다시 이천경이 써준 편지를 지니고 무주 읍내 인삼을 재배하는 이시발에게 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또 편지 한 장을 받아 지례군 천곡에 사는 성태영 집에 이르러 상객으로 대우를 받으며 한 달여를 지냈다.

이때 유완무가 찾아와 그가 살고 있던 무주읍내로 김창수를 데려가서 함께 지냈다. 유완무는 김창수란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주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이라 지어줬다. 그러면서 그동안 이천경과 성태영 등에게 보내 김구를 한 달간씩 머무르게 한 것은 그를 관찰,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

"연산 이천경이나 지례 성태영이나 다 내 동지인데, 서로 동지가 생길 때 반드시 몇 곳으로 돌아가며 한 달씩 같이 살면서 각기 관찰한 바와 시험한 것을 모두 모아 어떤 사업에 적의한 자격인가를 판정한 후에 관직에 적당한 자는 벼슬을 하도록 주선하고, 상농에 적합한 인물은 상농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이 정한 규칙이오. 자네는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얕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하되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맡아 성공하도록 해나갈 작정이오."


이후 김구는 유완무의 제자인 강화 장곶에 사는 주윤호 진사 집에 몇달간 머무르다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구가 마침 부친상을 당하면서 유완무의 계획은 중단되었고,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훗날 김구는 "평생 친구인 유완무나 성태영 등을 만나 그들의 주선으로 연산으로 이사하였다면 늘 상놈 대우를 받던 아버님의 한을 면하게 했을 것이다."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2.3. 북간도에서의 행적[편집]


1902년경, 유완무는 북간도를 주유하면서 독립군 기지 건설 방안을 구상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03년 장연군 사직동에 머물고 있던 김구를 방문한 유완무는 자신이 간도관리사 서상무(徐相茂)와 만나 장래의 일을 의논하고 왔다면서, 동지들과 방침을 협의하고 곧 북간도로 갈 것이니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또한 1904년 간도감계(間島勘界) 관계 지리서인 <북여요선(北輿要選)>[3]의 간행사업을 주도하였고, 서문을 집필했다.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한국의 산천은 모두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삼았고 (중략) 북간도의 간동, 해관, 남경 세곳은 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발상지였다. 간도는 곧 우리에게 기첨과 풍패의 지방인데,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보아서야 되겠는가. (중략) 강희년간에 경계를 정할 때에 진실로 토문 이남은 우리의 국토에 속하게 했은즉, 이제 어찌 공법을 업신여기고 선대의 법을 어기면서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고 엿보는가! (중략)

이 책이 출판되어 만국의 여러 사람들이 공평한 시각으로 백년간의 의안(疑案)을 깨뜨릴 수 있다면, 구음의 땅이 노나라에 반환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나 또한 이 지역에 온 힘을 다하여 돌아다녔고, 이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동안 마음을 다한 자이라. 고로 나의 비루함을 잊고 이와 같이 쓰노라.


이후 간도에서 살던 유완무는 장지연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읽고 장지연에게 서신을 보냈다.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위암장지연서간집' 제2권에 수록된 서신에서, 그는 대한강역고가 한국 지학(地學) 발전에 유익한 것이라고 칭송하면서도 중요 오류를 지적하여 정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고려 시대 윤관 장군이 선춘령에 세운 '고려지경'이라고 각자한 경계비가 두만강 너머 700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했다며, 정약용아방강역고 이래로 길주, 명주 지방에 경계비가 있는 것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장지연이 그대로 답습했으니 당장 바로잡으라고 권고했다.

유완무가 북간도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국내를 내왕하고 있었던 사실은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1906년 초여름 서울에서 이회영이상설, 여준, 이동녕 등과 함께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했을 때, 그도 이 모임에 참석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국내에서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만주로 건너가서 근거지를 건설하여 장기 항전할 것을 논의했다. 이후 신민회가 만주 독립운동기지 설치 계획에 따라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을 때, 유완무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4]

장지연의 <해항일기>에 따르면, 유완무는 함경도 이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망명을 권유했고 1908년 1월 대구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장지연을 만났다고 한다. 또한 유완무는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한 조창용이라는 청년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고 장지연에게 보내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동행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 경시총감이 <해조신문>에서 일하던 조창용을 심문한 뒤 외무부장에게 발송한 비밀보고서 <해조신문사원 취조의 건>(발송일 1908년 7월 8일)에 따르면, 유완무는 1908년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이곳에서 배일적인 신문의 발간과 국민교육 기관 설립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성신문 사장이던 장지연을 점찍고 그를 초빙해 해조신문 주필로 위촉하여 국권 회복과 배일사상 고취를 위한 계몽적 논조를 강화하게 했으며, 대구협성학교 교사 출신인 조창용의 망명을 알선하여 1907년 5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설립된 계동학교의 교사로 부임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복벽파와 계몽파로 갈라져 심한 갈등을 빛었고, 결국 유완무를 비롯한 계몽파가 추진했던 <해조신문> 발행은 1908년 5월 26일 제 71호로 중단하고 계동학교 운영도 곧 중단되었다. 이에 실망한 장지연과 조창용은 상하이로 향했다.

한편, 유완무는 저명한 유학지 이승희의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돕기 위해 국내를 왕래했다. '한계유고'에 작성된 '년보'에 따르면, 이승희는 국내에서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망명을 결심하고 무주의 사인(士人) 유완무가 광복에 뜻이 있어 해외에 비밀리 통하고 연결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연락하고 약속하고는 부산으로 가서 있다가 5월 9일에 러시아령 해삼위에 당도했다고 한다.

또 다른 글인 <통모록>에 따르면, 이승희가 감옥에서 나온 후 배를 탈 결심을 하고 탐문하니 유완무가 '복국사상'을 가지고 이미 러시아에 왕래하면서 망명객들과 더불어 연락하므로, 유완무와 연락을 취하여 망명 방법을 의논하여 4월에 출발하기로 정하였으나 일본인들이 을사조약 체결 후 러시아 행을 엄히 단속하므로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다가 이승희와 그의 문인인 이덕후, 정복희, 이수인 등이 유완무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부산까지 가서 기선을 타고 20일간의 항해 끝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완무의 협조로 연해주로 망명한 이승희는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동삼성 공교회를 설립해 유학자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등 일련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유완무는 1908년경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 사실은 서북학회의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 1908년 2월호 말미에 기술된 '회계원보고'에서 신입회원으로서 입회금 1원을 낸 데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서북학회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08년 1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공립협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방회를 설립하기 위한 모임을 개최했는데, 유완무는 이 모임에도 신입회원으로 참가했다. 1909년 1월 7일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설립대회에도, 그는 회원으로 참여했다.

2.4. 암살[편집]


<권업신문> 1912년 8월 25일자 기사 '유백초의 해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게재되었다.

북간도와 혼춘 등지에 교육가로 열심 종사하던 유백초 완무씨는 삼, 사년 전에 혼춘 타두거우 등지로 가다가 중로에서 불행히 횡사를 당함은 일반 동포의 애석하는 바요, 또 해골도 찾지 못하고 몇 해 동안에 그 아들 형제가 각처로 유리개걸하면서 탐지하더니 마침 그 차자 유웅표가 혼춘 심판청에 고소하여 그 행흉하던 자 사오인을 착수하고 심문한 결과에 정범 정금석은 도망하고 종범 삼인의 자백으로 증거는 해골이 나졌고 장물은 말 한 필, 금전 80원을 그 시에 정금석 등이 분급한 일과 또 교사한 자가 있다하여 지금 심판청에서 예심하는 중이라더라.


이후 권업신문은 1912년 11월 17일 범인을 조사한 결과를 담은 혼춘경무국의 '경무국비밀조사안'을 전문 게재해 유완무의 암살과 관련된 내막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09년 2월 24일 저녁이 다 될 무렵 유완무가 말을 타고 신풍까지 가던 중 괴한 4~5명에 의해 홍기하 방면으로 유괴되어 끌려가 암살되었다고 한다. 유완무를 암살한 자들은 '관리사도'의 명령을 받고 그를 끌고 가서 죽인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여기서 관리사도는 당시 간도관리사를 맡았던 이범윤이다. 범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범윤은 정금석, 정태유, 이성옥, 김익한 등에게 유완무를 포살하라는 문적을 내렸고, 이에 따라 유완무를 홍기하의 깊은 골짜기로 유괴하여 죽인 뒤 유완무의 말과 유품들을 가져다 팔다가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권업신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리와 류씨는 과연 나라일로 위하여 동서로 분주하던 이가 아닌가. 그와 정분 있는 친구도 있을지며 그와 동정 있는 지사도 있을지어늘 어찌하여 그이 죽은 이후에 지금까지 그의 원한을 씻으려 하는 이가 없었느뇨. 아무렇게나 이번 이 안건을 조사한 이에게 대하여 일반 양심있는 자는 함께 감사할 뜻을 올릴 바로다. (중략) 오호라! 의병도 하며 무엇도 한다하던 이범윤씨가 참 이일이 있는가. 우리는 급히 그 대답을 듣고자 하노라.


당시 이범윤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방략을 놓고 최재형, 최봉준 등과 심한 갈등을 빛고 있었다. 이범윤은 이씨 왕조의 복벽을 추구하며 의병 투쟁을 우선시한 반면, 최재형과 최봉준은 민족 계몽이 우선이며, 왕정 복고보다는 공화정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최봉준은 1908년 3월 27일 <해조신문>에 '본사 최봉준공 역사논평'이라는 글을 실어 의병운동이 한인의 산업과 국내 교역을 방해한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이범윤의 연해주 의병대는 의병과 군자금 모집에 큰 장애를 입었다. 이에 분개한 이범윤의 심복들인 한기수(韓起洙)[5] · 박창수(朴昌洙) · 박준남(朴俊南)이 1908년 말 최재형의 부하 김기룡(金起龍)을 암살하려고 김기룡이 유숙하고 있던 최재형의 집에 쳐들어갔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양자간의 갈등 속에서, 유완무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해조신문> 발간에 앞장섰고 계몽파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의병 활동에 발목을 잡는 최봉준, 최재형 계열과 심한 갈등을 빛고 있던 이범윤에게 있어 그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완무는 자신과 함께 한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3. 사후[편집]


1913년 11월 20일, <권업신문>은 혼춘 신풍학교 학생 일동이 유완무가 암살된 곳인 혼춘 홍치허를 찾아 조례를 표하고 통곡한 뒤에 그곳에 정동학교를 세워 고인의 넋을 기렸다고 보도했다. 정동학교는 45명의 학생으로 출범했다고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는지 이 기사 외에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이로 볼 때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유완무의 인지도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계봉우가 1920년 5월 15일 <독립신문>에 게재한 '의병전'의 다음 대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범윤이 일시의 감정으로서 중요인물인 유완무를 살해한 그것이 또한 (독립군의) 군심이 흔들리는 데 다대한 원인이 되었다.


1951년 대한민국 사회부는 '순국선열유가족심사위원회'를 조직하여 각종 사료를 수집하여 조사한 뒤 1차로 134명의 순국선열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이 명단엔 유완무의 이름이 들어있었다.[6] 그러나 이듬해 관보에 게재된 관보에서 순국선열 대상자로 지정된 것을 끝으로, 유완무는 오랜 세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2009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이류계 이판공파 34세 무(茂) 항렬.[2] 인천지지와 서구향토지에는 이명인 류인무(柳寅茂)로 기록되었다.[3] 간도 관리사 이범윤이 간도 현지민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간도 지역의 연혁을 정리해 경원의 처사(處士) 김노규에게 집필하게 한 서적. 대한제국의 간도 관리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다.[4]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p.29[5] 독립유공자 한기수와 동명이인이다.[6] '순국선열 유가족에게 생활비 지급', <서울신문> 1951년 12월 9일자 기사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