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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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풍산 류씨[1]
출생
1895년 3월 1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2]
사망
1945년 3월 29일
경상북도 안동군
이명
유해동(柳海東)·김세진(金世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시언은 1895년 3월 1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3.1 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상하이로 망명한 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은 그는 국내에서 유성우 등과 긴밀히 상의하고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문경·상주 일대에서 현금 310원과 현금증표 5,000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그는 급히 만주로 피신했고,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베이징으로 이동한 그는 이곳에서 김정묵(金正默)·최용덕 등과 함께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22년 봄에 베이징을 떠나 길림(吉林)으로 돌아 온 그는 길림교육회의 운영을 맡아 교육을 진흥시키는 한편,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길림교육회의 대표로 이에 참석한 그는 헌법기초 위원, 교육위원장에 선발되어 통합된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내분이 계속되자, 그는 만주로 되돌아가 독자적인 항일투쟁 방향을 모색하다가 마침내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4년 10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3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유시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26세 시(時) 수(壽) 재(在) 항렬.[2]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