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페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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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윌리엄 페이토
William Peyto
생몰년도
1394년경 ~ 1464년 11월 2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채스터튼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채스터튼
아버지
윌리엄 페이토
어머니
조앤 손버리
아내
엘리자베스 프란시스, 캐서린 그레슬리
자녀
존 페이토
직위
기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2. 생애[편집]


1394년경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채스터튼에서 기사 윌리엄 페이토와 조앤 손버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1428년부터 1430년 2월까지 워릭셔와 레스터셔의 보안관을 역임헀고, 다시 1436년 11월부터 1437년 11월까지 워릭셔와 레스터셔의 보안관을 맡았다. 이후 크레유 성 수비대장을 역임하던 중 1441년 5월 8일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 2주 후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 포병대가 성벽을 뚫자, 5월 24일에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했지만 패퇴했다. 결국 5월 25일에 노르망디로의 안전한 이동을 허락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1442년 11월 존 탈보트의 휘하에서 디에프 공방전에 참여했고, 디에프의 교외 지역인 폴레토 언덕에 세워진 목조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탈보트가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추가 병력과 탄약을 구하는 동안 잉글랜드군을 임시로 지휘했다. 그는 도시를 계속 포격했고, 썰물 때마다 디에프로 쳐들어가서 적 수비대와 교전했으나 격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수비대 역시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기에, 공방전은 8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1442년 7월 24일, 도팽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 1,600명이 퐁트누아에서 출발해 디에프로 진군했다. 8월 10일 디에프 근교에 도착한 루이는 윌리엄 페이토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페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방어하겠다"라고 답했다.

루이는 500~600명의 군인을 적 성채 앞 숙영지로 보내 봉쇄하게 했고, 성벽에 내걸 다리와 바퀴가 달린 공성탑 5~6개를 건설했다. 8월 14일 오전 8시, 프랑스군은 나팔 소리에 맞춰 잉글랜드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프랑스군 100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군 장병들은 이를 악물고 공세를 이어갔고, 도시 수비대와 시민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 성채를 향해 석궁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성채는 함락되었고, 300명이 전사하고 페이토를 비롯한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루이는 잉글랜드 포로 중 "프랑스어를 하는" 자들을 프랑스인인데 잉글랜드를 위해 싸운 반역자로 간주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잉글랜드군이 세웠던 요새는 루이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대포는 디에프 무기고로 옮겨졌다. 페이토는 사로잡힌 뒤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45년 3,000에쿠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다 1464년 11월 24일에 사망했다.

윌리엄은 생전에 포레마크의 기사 로버트 프란시스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처음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후 기사 존 그레슬리의 딸이자 바진턴의 기사 토머스 스태퍼드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슬리와 결혼해, 외아들 존 페이토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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