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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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남진의 관료로 자는 자공(子恭).
2. 생애[편집]
진군(陳郡郡) 양하현(陽夏縣)을 본관으로 하는 교성(僑姓)인 진군 원씨 출신이며, 양나라의 사공 원앙(袁昂)의 아들이자 유송의 시중 원의의 손자였다.
원경은 純孝 풍격이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다. 처음 비서랑(秘書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태자사인(太子舍人), 세마(洗馬), 중사인(中舍人)을 역임했으며, 강릉(江陵)이 함락된 뒤 영표(嶺表)로 옮겨 살았다.
557년, 진패선이 경제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를 때 원경은 광주(廣州)에서 구양위를 의탁하였다. 구양의가 죽은 뒤 아들인 구양흘이 주를 점거하며 다른 뜻을 품으려고 하자, 원경은 구양흘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지만 구양흘은 결국 원경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 569년 선제가 장소달을 파견하여 구양흘을 토벌할 때 구양흘은 결국 원경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조정에서는 원경을 의롭게 여겨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제수하였다. 원경은 뒤에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로 전임되었으며, 좌민상서(左民尙書), 도관상서(都官尙書)를 겸임하고 예주대중정(豫州大中正)을 겸임하였다. 또한 태상경(太常卿), 산기상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역임하고 특진(特進)이 더해졌다.
585년에 사망하여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추증되고 정덕(靖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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