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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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왕주이(汪竹一 / Wang Jui)
한국식 독음
왕죽일
생몰년도
1905년 7월 23일 ~ ?
출생지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콴윈현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왕주이는 1905년 7월 23일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콴윈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립기남대학(國立暨南大學)[1] 정치경제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를 수학하였고 뒤에 워싱턴내셔널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 철도부 비서를 시작으로 교통부 전시노동자훈련위원회 부주임 겸 교육장, 재료사 차관, 대리사장, 상해시정부 참사, 국민참정회 비서, 중앙진제(賑濟)위원회 위원, 전시운수관제국 전문위원, 행정원 신강건설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일전쟁 중에는 외교부 아주사령장(亞州司令長)으로 재직하면서 한중 양국의 우의를 견고히 하고자 애썼으며, 1941년에는 미얀마에 파견되어 중국국민당 당무공작을 지도하였고 화교소산위원회 위원 및 초대 조주임을 겸임하였다.

또 1942년 10월 충칭에서 한중 양국의 문화 교류와 단결, 동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가 창립되자 협력조정실(協力調整室) 부주임으로 선임되어 연락부장(連絡部長)을 맡았다. 한중문화협회 회장은 쑨커, 부회장은 조소앙김규식이었고, 왕주이는 이사·부비서장 등을 역임하며 한중연대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45년 4월 교통부 비서에 취임하였고, 그해 9월 중일전쟁이 종전되자 상해시 참의원, 후보입법위원, 장쑤성·저장성·안후이성·베이징·상하이 지구 면방공업 공회 비서장을 역임했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전에 대만으로 망명했다.

1951년 중화민국 행정원 설계위원,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전국공업총회 비서장, 국제사자회 중국회 제2대 회장, 중국공상협진회 상무이사 겸 비서장, 국제무역협회 이사장, 화교자본협진회 이사장, 국화관 상무경영자 겸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입법위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왕주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시에 있는 지난대학과 대만 난터우현에 있는 국립지난국제대학의 전신이다. 청나라 말기 난징에서 기남학당(暨南學堂)으로 개교하였고, 1927년 국립지난대학(國立暨南大學)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49년 8월 푸단대학상하이교통대학에 합병, 폐교되었다가, 중국 대륙에서는 1958년 재건되었고, 대만에서는 1995년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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