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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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진보국숭록대부 상장군
마전군 귀의군
왕조
작위
정강군(定康君)
귀의군(歸義君)
본관
개성 왕씨

조(珇)
사망
음력
1398년 8월 26일
양력
1398년 10월 6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인물. 귀의군 왕우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고려 말에 정양부원군 왕우의 적장자로 정강군에 봉해졌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로 사돈 집안인 태조의 비호로 아버지와 동생 등 일가족은 다른 왕씨들처럼 개경에서 지방으로 쫓겨나지 않았다.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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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조선에서 왕조는 상장군, 동생 왕관(王琯)은 대장군에 임명되는데, 이 때 형제는 어머니의 성씨인 노씨로 성을 바꿨다.

1397년 부친상을 당한다. 왕조는 특진보국숭록대부 마전군 귀의군을 습봉하고 성씨를 원래대로 바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려 태조 및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안군 이방원이 집권한다. 정도전, 남은 등과 무안대군, 세자 방석 등이 죽임을 당하는데, 왕조와 동생 왕관도 같은 날에 죽는다. 왕조 형제를 죽인 주체가 실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왕씨 제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살아남은 왕씨라는 점과 숙청 대상인 무안대군과 처남매부 지간이라는 점 때문에 이방원 일파에게 죽임을 당한것으로 보인다.

왕씨 제사를 받들던 형제의 죽음으로 마전군 귀의군 작위의 습봉과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는 끊겼다. 50여년 뒤 문종의 집권기에 공주에 살던 순흥군 왕승의 자손 왕우지를 데려와 제사가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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