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탕스 만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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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랭 여공작
오르탕스 만치니
Hortense Mancini, Duchesse de Mazarin


파일:Hortense Mancini.jpg

이름
이탈리아어
오르텐시아 만치니
(Ortensia Mancini)
프랑스어
오르탕스 만치니
(Hortense Mancini)
출생
1646년 6월 6일
교황령 로마
사망
1699년 6월 11일 (53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첼시
장례식
1699년 7월 2일
프랑스 왕국 파리 생 로랑 교회
배우자
메이예레 공작 샤를 드 라 포르트 (1661년 결혼)
자녀
마리 샤를로트, 마리 안, 마리 올랭프, 폴 쥘
아버지
로렌초 만치니
어머니
제로니마 마자로니
형제
로라, 폴, 올랭프, 마리, 필리프, 알폰스, 마리 안
1. 개요
2. 생애
3.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의 정부. 프랑스의 재상 쥘 마자랭의 조카이다.


2. 생애[편집]


이탈리아 귀족인 아버지와 쥘 마자랭의 여동생 제로니마(지롤라마) 마자로니의 4녀로 태어났다. 오르탕스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프랑스로 이주했다. 오르탕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모두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며[1] 외삼촌 마자랭의 영향력 덕분에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었다. 1661년에 오르탕스는 15살의 나이에 메이예레 공작 샤를 드 라 포르트와 결혼했다. 마자랭은 사랑하는 조카에게 마자랭 여공작 작위를 주었으며 샤를은 마자랭 공작위를 겸하게 되었다.

오르탕스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샤를 드 라 포르트는 정신이 불안정하고 인색했으며 심한 의처증 환자였다. 샤를은 아름다운 오르탕스를 의심하며 학대하고 감시했다. 한번은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며 오르탕스를 수녀원에 감금해버리기도 했다. 참다못한 오르탕스는 1668년에 아이들을 두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탈리아에서 오르탕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에서 도망친 언니 마리와 의지하며 지냈다. 자매는 남편들에게 발각될 것을 두려워해 남장을 하고 유럽을 떠돌았다.

오르탕스는 루이 14세의 비호 아래 연금을 받으며 지냈다. 과거 그녀의 구혼자 중 한명이었던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오르탕스를 곁에 두고 보호했으나 그는 일찍 죽고 말았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죽은 뒤 남편에게 발각된 오르탕스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샤를은 오르탕스의 재산을 빼앗고 루이 14세가 보내는 연금을 가로챘다. 생계에 문제가 생긴 오르탕스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본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 랄프 몬태규가 접근했다. 랄프 몬태규는 오르탕스를 찰스 2세의 정부로 밀기로 하고 그녀에게 잉글랜드로 떠날 것을 권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오르탕스는 승낙했다.


파일:1675_Jacob_Ferdinand_Voet_-_Hortense_Mancini.png

마자랭 여공작 오르탕스 만치니, 1675년

1675년에 오르탕스는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의 아내로 시집가 있던 오촌조카 모데나의 메리를 만난다는 명목으로 잉글랜드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오르탕스는 찰스 2세의 정부가 되었고, 가장 총애받는 정부였던 루이즈 드 케루알의 자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오르탕스는 찰스 2세로부터 4000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면서 경제적 문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오르탕스에게는 찰스 2세 외에도 여러 애인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찰스 2세가 또다른 정부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와의 사이에서 난 딸 서섹스 백작부인 앤 피츠로이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고 오르탕스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오르탕스는 모나코루이 1세와 스캔들이 나면서 찰스 2세의 정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스캔들로 크게 화가 난 찰스 2세는 오르탕스에게 주어지는 연금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 찰스 2세는 다시 연금을 지급했으며, 두 사람은 이후 친구 사이로 지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사망하고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왕비 모데나의 메리의 친척이었던 오르탕스는 찰스 2세의 다른 여러 정부들과는 달리 잉글랜드에서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오르탕스는 첼시에 살롱을 운영하다가 1699년에 병이 들어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생 로랑 교회에 안장되었다.


3. 자녀[편집]


불행한 결혼이었지만 남편 샤를과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찰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없다.

장녀 마리 샤를로트와 삼녀 마리 올랭프는 프랑스의 귀족에게 시집갔으며 차녀 마리 안은 수녀가 되었다.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을 비롯한 마이넬 자매들이 오르탕스의 증손녀들이다. (마이넬 자매의 어머니가 오르탕스의 외손녀) 유일한 아들인 폴 쥘은 아버지의 메이예레 공작위와 어머니의 마자랭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나중에 이 아들의 여자 후손이 모나코 공가로 시집가고[2] 아들 2명을 낳으면서 현 모나코 공가의 조상이 된다.

4. 여담[편집]


  • 오르탕스 만치니는 찰스 2세의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 1659년에 망명 중이었던 찰스 2세는 오르탕스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끼는 조카를 망명 중인 왕족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자랭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후에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마자랭은 급히 막대한 지참금을 제시하면서 혼담을 재개하려고 했지만 찰스 2세는 브라간사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 양성애자이다. 서섹스 백작부인 앤 피츠로이[3]와 확실한 연인 사이였으며 남편과 함께 살 때도 여성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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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르탕스의 언니 마리 만치니루이 14세의 첫사랑으로 유명하다.[2] 중간에 이혼한다.[3] 찰스 2세의 사생아로, 그의 또 다른 정부 바바라 팔머의 소생이다. 오르탕스의 입장에서 앤은 남친의 딸이고, 앤 입장에서 오르탕스는 아빠의 여친.